2004년 B중학교로 옮겨 교무부장 업무를 맡아 하면서 부장회의, 교무회의뿐만 아니라 월간기획회의, 학교운영위원회 등 회의에 파묻혀 살았다. 직접 주관하는 회의 외에도 00사건에 대한 대책협의업무 등 꼭 참여할 수밖에 없는 학생, 교사와 관련된 심각하고 시급한 회의까지 나날이 회의라 ‘회의주의(?)’에 빠지겠다는 농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또 회의와는 별도로 해마다 있는 입학식, 졸업식, 종업식, 장학지도 준비업무, 학교운영계획서 업무, 급식과 관련한 직원 선발심사, 급식업체 선정, 강당 개관식, 식당 준공식, 방송실에서의 영상 애국조례까지 역할 분담과 시나리오 작성 등의 절차를 잡음없이 무난히 수행했다는데 만족한다.
업무과중으로 수업을 조금은 덜 맡을 수 없을까 애써봤지만 해마다 미술과 증원은 불가능해서 도리 없이 새내기 교사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20시간 정도의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상이 중학생들이니 중학생 학년별 수준과 미술교육과정에 적합한 자료를 만들고 나름대로 제작한 독창적인 작품을 보여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02년이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면 2005년은 한 많은 고통의 해였다. 교육복지우선투자지역 학교로 선정돼 그 사업추진 입안 계획 세우는 일도 이 지역 최초의 일이라 머리털이 다 빠질 지경인데 차후 승인된 프로그램에 따라 추진할 시점에서는 아무도 선뜻 주무부장을 맡지 않으려 했다.
임대아파트 주민 자녀가 많이 다니는 이 학교에 설상가상 여름방학기간에 불행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체험활동 간부학생수련회는 학생지도부 일로 담임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권유에 따라 80명 학생의 인솔교사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전에도 동행한 경험있는 강원도 00연수원의 계획에 따라 무리없이 진행되었으나 정선 동강에서 레프팅 체험 중 동행한 조교의 지도에 따르던 학생들이 서로 부딪치는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1명 실종, 끝내 사망한 사건이다.
얼마 전 서해상의 천안함 실종이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며, 또 사망자 구출작업이 어렵고 온 국민을 가슴 아프게 하여 누구의 소행인지, 지금도 언제 마무리 될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규모의 차이야 있지만 그 충격만은 이와 똑같았다고 할 수 있다.
차도의 수많은 차량과 인파. 연락 받고 장비를 갖춘 구조원이 와서 샅샅이 훑고 수색해 여러 시간이 흐른 후 시신 발견. 멀리서 올라온 유가족의 비통한 절규와 항의. 죄인처럼 엎드려 빌 수밖에 없었던 교장선생님과 전체 인솔교사. 밤새 잠 못 자고 학생 인솔을 맡아 선발대로 온 일, 중간 역할을 담당할 교사를 정해 계속한 유가족과의 협의, 수없이 거듭되는 교육청 보고, 교육청 권유에 따른 유가족 방문에 빗발치는 분노와 항의, 보험금 지급과 레프팅 주관 회사 위로금 지급, 장례식을 학교장으로 거행할 것 등 요구사항에 대한 수차례 협의 후 타협안 합의 등 이상의 과정은 밤새 이어졌고 학생부소속 인솔교사는 정신도 없고 보고서 작성에 미숙하니 조금은 덜 죄스러운(?) 나를 보고문안 작성제출에 적격이라며 지목하니 인솔교사로 동행했고 업무도 교무인지라 맡을 수밖에 없었다. 날밤 새며 인터넷 검색을 거듭해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學校葬에 대한 식순 시나리오를 연거푸 뜬눈으로 밤새워 작성하고나니 아침8시. 사회를 맡아야 할 11시 장례식이 코앞에 닥쳤으니 한치 여유도 없었다.
비통하지만 엄숙하고 애끓는 장례식은 고인의 부모 입장 시간에 갑자기 멈춰버렸고 짧은 순간 정적이 너무나 길게 느껴져 긴장이 극에 달했다. 슬픔으로 쓰러진 고인의 어머니를 사회자 위치에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이후 추도사 등 식순에 따른 장례식은 무난히 이어져 끝이 났지만 학생사망사건 해결은 시작에 불과했다. 학교안전공제회는 많은 보험금과 중복되게 보상을 할 수 없다는 통보, 변호사와의 면담, 추가 보상 요구에 따른 교장 및 인솔교사 전원의 위로금 출연, 거듭된 보상 요구에 전체 직원 및 학부모의 자발적 성금 모금, 유가족은 보상액을 거듭 올려 요구하니 인솔교사가 다시 한 번 사죄하는 뜻으로 돈을 더 보탰지만 그래도 끝없이 보상을 요구하는 데에는 단호하게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교육청에서는 환자와 다름없는 우리 인솔교사들을 불러모으기도 하고 사건 종결까지 수시로 보고를 끝없이 요구했다.
그 후로도 유족은 교장실 점거, 학생들이 수업하는 교실에 수시로 드나들며 고인을 대신해 수업하겠노라며 점거했으니 친구나 제자를 잃은 아픔에 더해 학생 교직원의 민망함과 괴로움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한 달도 훨씬 더 지난 어느 날 유가족 측이 갑자기 '00사에서 스님 설법을 듣고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게 됐다'면서 더 이상 돈을 요구하지는 않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인솔책임자와 나는 四十九齋까지 참여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장례식 치른 바로 그날 아내의 만류도 듣지 않고 장거리 운행에 나섰다가 졸음운전으로 사고가 났다. 차량가액보다 수리비가 더 드는 견적에 오래된 차를 폐기했다. 결국 아픈 몸으로 한 달이상 대중교통만 이용하는 고생을 감수해야했다.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가 공연한 고생만 하고 피해 본 내 입장을 위로하는 뜻으로, 아니면 충격을 덜 받도록 한다고 건네는지 모르되 ‘교육청에서 어떠어떠한 조치를 내려질 듯하니 혹 그렇더라도 그리 아시라’는 인솔책임자(교감)의 귀띔은 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길고도 험난한 학생사고의 후유증은 그 후로도 무척 오래 지속되었다. 사흘만 지나면 관심 없다는 남의 일이 아니었기에 5년이 지나 '천안함 침몰 비극'의 시점에 와서야 기록으로 남긴다.
그후 나는 스스로 교무를 비롯한 모든 부장업무를 사양하고 내 수업과 환경미화, 교총업무 등의 일에만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