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구암 선생은 1960년도 중반에 접어드는 1964년에 학교의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 병아리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되어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 그 때만해도 우리나라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때여서 농업이나 수산업 등 1차 산업에 의해서 생활을 하는 국민이 약 80% 이상을 차지하는 대부분이었고, 나머지가 약간의 상업이나 공업, 그리고 가장 부러워하는 대상인 공무원 등 사무직의 순서였다. 이 고장에서는 특히 농업을 빼고 나면 한 반에 한 명이나 두 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정도였으니까. 아마 이 반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은 집은 송자네 한 집 뿐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농촌 사람들의 부러움을 가득 받는 교사라는 직장에서 근무하게 된 것만도 여간 기쁨이 아니었으므로 성구암 선생은 무엇이나 최선을 다하기로 했었다.
그렇지만 성구암 선생이 발령을 받은 학교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참으로 보잘 것이 없고 허술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우선 학교 모습을 보면 밖에서 보이는 것으로는 마을 앞에 덩그랗게 선 교실 네 칸, 국기 게양대 하나, 흙으로 벽을 바르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두 칸짜리 화장실 하나가 전부였다. 교실 안에는 49건짜리 오르간 하나와 책걸상, 교탁이 이 학교 시설의 전부이었다. 운동장은 아직도 닦아지지 않은 상태여서 논바닥에 벼 포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모래 한 줌도 뿌려지지 않은 논바닥과 논두렁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니까, 비라도 오면 물이 고여서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고, 물이 고여 웅덩이처럼 보이곤 하였다. 화장실은 논바닥을 파고 산에서 베어온 소나무를 깎지도 않은 채 그냥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웠고, 벽은 나뭇가지를 얽어 외를 엮고 나서 흙으로 발라서 겨우 밖에서 보이지 않게 가려진 두 칸이 전부였다. 화장실 문은 짚으로 짠 가마니를 반으로 갈라서 달아매어 두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문을 열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젖히고 들어간다고 해야 맞는 말이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모두 7학급이나 되는 4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이용할 화장실은 남녀 각 한 칸 씩 뿐이었고, 남자아이들은 바쁘면 논바닥에 그대로 용변을 보기도 했었다.
어디까지가 학교와의 경계인지도 모를 정도로 아무런 표지도 울타리도 없었다. 학교라고 단 한 그루의 나무나 꽃 한 포기도 없는 처량하기까지 한 학교 풍경이었다. 7학급 400여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아무런 시설도 없는 이런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도 모두들 신나고 기분이 좋아 있었다.
교실이 부족하여 1,2,3학년은 2부제 수업을 해야 했었다. 오전 11시쯤이나 되어서 오전반이 셋째시간이 끝나면 넷째 시간은 체육을 하거나 음악, 미술 같은 시간으로 해서 밖으로 나가서 수업을 하였다. 오후반 아이들은 이 시간이 거의 되면 학교를 향하여 출발을 하여야 하는데 이게 문제였다. 바쁜 농사철이 되면 부모님은 새벽같이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시고 아이들만 남아있는데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고 나서기도 어려웠지만, 누가 시간을 보고 맞춰서 가라고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 그만 시간이 늦어져 버리기도 하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시간을 짐작 할 수가 없어서 준비를 하고 학교에 가보면 아직 두 시간도 끝나지 않아서 갈 곳이 없어서 좁은 복도에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었다.
그래서 성구암 선생이 맡은 2학년 1반은 오후반이 되면 아예 아침부터 학교에 나오게 했다. 날씨만 좋으면 학교 옆에 아직 팔목만큼 밖에 안 되지만 느티나무가 심어져 있는 작은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서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시간을 보냈다. 논둑에 흩어져 있는 풀들을 모아서 이름을 맞춰 보기도 하고 풀꽃을 모아서 예쁜 꽃다발을 만드는 놀이도 재미있었다. 담임인 성구암 선생은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학교에 늦지 않고, 공부에 재미를 붙이며 별로 할 일이 없는 오전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보낼 수 있게 만들어 주려고 했었다. 아이들은 날마다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정자나무 그늘에서 노래를 불렀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면서 직접 관찰하고, 만지면서 공부하는 것이 한없이 즐겁고 신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전부터 학교에 와서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수업이 끝나는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어려워하였다. 더구나 이 무렵에는 너무 가난해서 끼니에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만큼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들을 오후 4, 5시까지 붙들고 있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 보였던 것이다. 성구암 선생은 아이들에게 점심을 싸 가지고 학교에 오라고 했다. 어떻게든 배고파하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때 만약 요즘처럼 학교에서 급식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적어도 점심을 굶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튿날 아이들은 정말 난생 처음으로 학교에 도시락을 싸들고 나온 것이다. 처음 싸 가지고 온 도시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어서 점심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이었다. 성구암 선생은 도시락이 준비되었으니 오늘은 안심을 하고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교촌 마을 앞에 있는 저수지 둑을 지나 무넘이 턱에서 작은 칠판을 기대놓고 산수공부를 하였다. 공부 하다가 작은 도마뱀이 나와서 여자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고, 남자아이 중에 누군가가 잡아 가지고 흔들어 대고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해가 점점 높아지면서 땡볕이 쬐어서 시멘트 바닥에서 더워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다시 자리를 옮겨 산으로 갔다. 마을 뒷산이라지만 같은 반의 여자 친구의 집 뒤란이나 다름없는 가까운 곳이었지만, 산으로 간 너희들은 나무그늘에서 노래도 하고 가져간 조그만 소칠판을 앞에 두고 재미나게 공부를 했다. 개미들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기도 하고, 나뭇가지에서 매미들이 노래를 해서 잽싼 아이가 나무로 올라가 매미를 잡겠다고 소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아이들은 참으로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시골의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두 함께 올라간 뒷산은 그것이 그냥 소풍날이었다.
점심을 먹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제각기 도시락을 펼치면서 점심을 먹으려고 준비들을 하였다. 여자아이들은 도시락을 감추기도 하고 짓궂게 남의 도시락을 펼쳐 보려고 덤비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 ! 준비되었지요. 점심 맛있게 먹으세요. 급히 먹지 말고.... ”
성구암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너희들은 도시락에 고개를 쳐 박고 정신없이 밥을 퍼 넣기 시작하였다. 성구암 선생은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한 번 죽 살펴보기로 하였다. 정신없이 퍼 넣는 아이들의 도시락을 살그머니 들여다 본 선생님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웬일이야 ? 까만 도시락?’
아이들의 도시락은 거의 대부분이 까만 밥이었다. 요즘에 유행하는 까만 쌀밥이었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아니었던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이 싸 오라고 한다니 안 싸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먹는 대로 밥을 싸준 것이었다.
이 고장은 바다에서 약 4㎞ 떨어져 있는 바닷가의 산골 마을이었다. 한 집의 식구 수는 평균 6명이 넘었지만, 농토는 900평도 채 안되었다. 이것은 학교에서 조사한 내용이었으니까 거짓말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집은 봄철만 되면 식량이 떨어져서 밥을 굶기를 먹기보다 더 많이 하였다. 마을 어른들은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무엇인가 끼니에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하였다. 그래서 해창만(지금은 간척지가 됐다)의 바닷가에 나가서 해초를 따다가 말려 놓고, 끼니가 되면 그 해초에 맷돌에 간 보릿쌀을 몇 줌 집어넣어서 멀건 죽을 쑤어서 먹는 것이었다. 이 봄철에 쌀을 몇 톨이라도 먹는 집은 부잣집 몇 집을 빼어 놓고서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 고장에는 해초 중에서 색깔이 까맣고 울퉁불퉁한 망울이 달린 톳이라는 해초가 흔했다. 이 톳에 곡식을 조금 넣어서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도시락을 싸오라고 하니까 그냥 그것을 한 도시락 싸들고 온 아이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도시락을 모두 뒤져 보았자 곡식이라고는 보릿쌀 몇 톨이 전부이고 모두 까만 톳이 전부이었으니 도시락은 까만색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구암 선생은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날마다 이렇게 산으로 들로 끌고 다니는 것도 이 아이들에게는 힘 드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끼니도 먹지 못한 아이들을 너무 심하게 끌고 다니지 않았는가 하고 스스로 반성을 해보는 것이었다.
바로 이날 성구암 선생은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싸오게 하는 일을 멈추기로 했었다. 아이들의 형편을 모른 채 너무 잘 못하고 있었던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였던 것이다.
‘이제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따져 보아야겠다. 까만 도시락 밖에 싸올 수 없는 너희들을 위하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고 아이들을 위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지만 저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먹이고 보살펴 주는 방법이란 없었던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형편이 아이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것을 그냥 보고 있으려니 늘 자신이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