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저녁 아내의 쓴소리를 들으며 집을 나서는 것이 썩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함께 있으면서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주어야 하는데도 그러하지 못하고 학교를 오다니.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 학생들이 머무는 학교에 오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학교에 도착하니 한 젊은 선생님께서 아들과 함께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내다가 막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 선생님은 저의 제자다. 믿음직스러운 제자 선생님이시다. 실망시키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니 고맙기도 하다. 꾸중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다른 선생님에게는 못해도 제자 선생님에게는 쉽게 할 수 있다. 참 이상하다. 더 잘해줘야 하는데.
학교에 오니 기숙사 앞에서 남학생 7-8명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직 운동장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놀 공간이 없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애들아 저녁 좋은 시간에 공부를 해야지” “공을 좀 차야만 수학문제도 잘 풀립니다” “아, 그래. 다치지 않고 유리창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예” 학생들의 목소리는 힘찼다.
아침은 늘 새롭다. 연상홍은 홍해를 이루고 있다. 출근하시는 선생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 같았다. 평소와도 같이 일찍 오시는 선생님은 역시 일찍 출근하셨다. 일찍 출근하시는 연세 많으신 배움터지킴이도 마찬가지로 일찍 출근하셨다. 그분들의 열정이 오늘도 붉은 꽃과 같이 아름답고 빛나는 아침이었다.
보름 전에 심은 학교 민둥산의 언덕에 ‘진리의 힘으로, 세계로, 미래로’라는 글을 연산홍으로 새겨 두었다. 중간중간 붉은 꽃이 피면서 글의 모양을 더욱 아름답게 선명하게 해 주고 있었다. 학생들이 학문의 전당에서 진리의 힘으로 세계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재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오늘 아침에도 짧은 글이지만 감동을 주는 글이 있었다. “소유한다는 것은 이(利)다. 써서 없애는 것이 용(用)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용(利用)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도 우리 선생님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된다.
이(利)는 이로운 것이다. 선생님들이 전문지식을 얻는 것이 바로 이(利)가 아닌가 싶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이(利)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많이 채워 그것으로 부하게 되면 이제는 그것을 나눠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용(用)이다. 내가 평생 고생해서, 노력해서 얻은 지식이라 하면서 그것을 뽐내기만 하고 자기의 것으로만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배우는 학생들에게 나눠주되 효과적으로 나눠줘야 한다. 그게 바로 용(用)인 것이다.
노자께서 하신 이용(利用)의 말씀을 잘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지식이라고 하여 자기를 선전하고 자랑하고 감추어두려고 한다면 용(用)의 실패다. 아무리 가르치고 나눠주려고 해도 자기가 가진 지식이 없으니 이(利)의 실패다. 그러므로 이(利)와 용(用)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겠다.
이(利)와 용(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좋은 선생님이라 할 수 없다. 평생 이(利)를 위해 애써야 하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동시에 학생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도록 나눠주는 용(用)을 위해 애써고 노력해야 한다. 이(利)는 배움이요 용(用)은 가르침이다. 그래서 우리 선생님들은 언제나 배움과 가르침이 동시에 이뤄질 수 있도록 함이 좋을 것 같다. 더 실력 있는 선생님, 더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 이런 것을 학생들은 원하고 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만족을 주고 기쁨을 주고 알고자 하는 바를 깨우쳐 주는 좋은 선생님, 감동을 주는 선생님이 바로 노자께서 가르쳐 주시는 이(利)와 용(用)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된다.
“有之以爲利(유지이위리),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 ‘소유한다는 것은 이(利)다, 써서 없애는 것이 용(用)이다’ 이(利)와 용(用)을 함께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연산홍의 붉게 물듦은 이(利)요 보는 이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것은 용(用)이 아닐까? 이(利)와 용(用)을 적절히 잘하는 선생님이 되도록 함께 노력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