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은 문학 비평, 영화 비평에서 보듯 예술 장르를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수업 비평이라는 말은 수업을 예술 장르로 본 것이다. 다소 생소한 면이 있지만, 이혁규 교수는 수업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저자는 ‘교사의 수업 행위에는 과학성의 측면과 예술성의 측면이 동시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수업을 예술 영역으로 확대했다.
예술은 뿌리에 기술적 측면이 있다. 넓게 보면 인간이 만들어내는 재주나 기교를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수업도 예술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보충 설명하면 예술은 인간에게 지식의 폭을 넓히고, 마음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기능을 한다. 그것이 술(術)이고, 예(藝)이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수업은 정의적 영역과 인지적 영역이 동시에 발현된다. 정의적 영역은 예에 해당하고, 인지적 영역은 술에 해당한다. 그리고 예술은 특수한 문화적 성격이 있다. 예술가의 개성적 인격을 바탕으로 한 감정 체험의 표현이다. 그 세계는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미적(美的) 의식을 형상화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다.
수업이 여타의 예술 장르처럼 창조적, 직관적으로 받아들인 미적 세계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예술이 인간의 재주나 기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하면, 수업도 충분히 예술 장르의 범주에 든다. 그리고 예술 세계는 예술가와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이 있다. 마찬가지로 수업도 교사의 능동적인 측면과 학생의 수동적인 측면이 필연적으로 포함된다는 점에서 예술의 성격이 짙다.
수업을 비평의 영역으로 확대한 것도 큰 전환점이다. 비평이 반드시 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프로그램 비평, 미디어 비평, TV 비평, 시사 비평, 문화 비평 등 비평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수업을 비평한다는 유연한 사고는 수업의 지평을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학교에서 가장 핵심적 기능인 수업을 관찰하는데 인색했다. 수업을 평가의 대상으로 여겼다. 수업 목표가 어떻고, 수업할 때 목소리, 복장, 판서 등을 수치화한다. 평가는 소위 상급자들이 국가의 교육과정을 얼마나 수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표준적인 교육과정이 정해진 만큼 교사의 창의성은 무시된다. 이것은 수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수업 행위를 점검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수업 비평은 수업에 대해 진진한 접근을 한다. 동료교사와의 수업공유와 고민을 함께 나누는 따뜻함이 있다. 평가는 단점을 찾고 지적하지만, 비평은 장점을 찾아 격려한다. 수업 비평은 교사에게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전달한다.
수업을 들여다 볼 때 비평자의 주관적인 잣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수업이 예술적 장르라고 한 것처럼 수업은 그 자체로서 창의적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다음 고찰도 공감이 간다.
교사 중심 수업 대 학생 중심 수업이라는 이분법은 과연 적절한가? 교사 중심 수업 방식과 학생 중심 수업 방식은 모두 교사가 선택할 수 있는 수업 전략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의 수업 주제를 교사 중심으로 다루는 것이 좋은지 학생 중심으로 다루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따라서 교사 중심 수업 방식이 나쁘다고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은 일단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상대적인 타당성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교사 중심 수업은 좋지 않은 수업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많은 교사들이 수업 주제에 대한 고려 없이 관행적으로 교사 중심 수업을 하기 때문이리라! 동시에 수업 주제와 연관성에 대한 고려가 없이 교사 중심 수업은 무조건 나쁜 수업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타당성이 결여된 수업을 보는 ‘눈’이자 ‘관행’인 셈이다. p. 59~60.
교육 분석가들은 무턱대고 학생중심 수업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수업은 2분법적 사고가 불가능하다. 수업은 교사와 학생 상호작용이 강조돼야 한다. 그리고 수업 주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일정한 틀이 있고 룰이 있다면 수업은 예술성도 창의성의 구현도 불가능해진다. 수업이 비평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처럼, 수업은 교사의 창의적 실천에 의지하는 힘도 있어야 한다.
수업 비평도 새로운 형식의 수업 ‘지적질’이고 ‘난도질’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비평은 심각한 고민이 있다. 비평은 글쓰기라는 정제된 언어로 표현되는 작업이다. 거기에는 진지함이 있고, 표현에 대한 책임도 있다. 비평이란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에는 명쾌한 진리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수업 비평에는 수업에 대해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관찰이 있다. 이런 이유로 수업 비평은 수업자와 독자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수업을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에 한정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다보니 오직 수업은 평가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이는 수업을 입체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제 수업을 비평의 대상으로 바라보면 교사와 학생, 수업 내용 등이 역동적으로 보인다. 아울러 수업이 학생과 교사가 마음을 따뜻하게 나누는 것도 볼 수 있다.
교사는 전문직에 종사한다고 할 때는 수업을 두고 한 말이다. 전문가의 일은 모두에게 공개되고 개방되는 것이 사회적 관습이다. 일반인이 볼 때 전문가가 하는 일은 숙련되어 보이고 때로는 감동이 있다. 교사의 수업도 그럴까. 수업이 여타의 전문직과 다른 점도 있지만, 폐쇄적인 것은 사실이다. 이유는 수업을 지나치게 평가의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수업을 공개하는 사람은 평가받으면서 마음의 상처를 얻는다. 그러다보니 차츰 수업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마음만 굳혀 간다. 그리고 교사들이 교실에서 안주한 것도 원인이다.
수업 비평은 교실 안에서 군림하고 있는 교사를 예술가로 소개한다. 동료에게 독자에게 예술가로서 나오기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은 수업과 독자가 소통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수업의 전문성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고, 수업을 하는 교사도 전문가가 되는 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교육개혁을 시도하면서 번번이 실패를 했다. 이유는 여럿이 있지만 교사를 주체로 보지 않고, 대상화했다는 것이다. 화단에 아무리 화려한 꽃을 이식해도 토양이 알맞지 않으면 시들어 버린다. 교육 개혁도 거대한 제도나 정책을 이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학교의 가장 밑에서 움터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교육 개혁은 교실을 보아야 한다. 수업을 보아야 한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를 통해 발전의 길을 찾아야 한다. 교사는 곧 수업 실천가다. 그렇다면 수업을 들여다봐야 올바른 교육의 해법이 보인다.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이 그려내는 수업에서 교육의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교실의 학생수를 줄여주는 등 교사의 수업 환경 개선을 고민하는 것이 교육 개혁이다.
이혁규 교수의 수업 비평은 혼란스러운 학교 문화에 신선한 충격이다. 정보화 시대의 교육 환경에서 수업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고립화(孤立化)되어 가는 것을 방지한다. 그리고 수업 비평은 우리 교육에서 수업이 감당해야 기능을 확대하고 학교 교육의 고유한 가치를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제 과제는 예술적 장르의 범주에 드는 수업의 창의성을 살리는 예술가들의 고된 작업만이 남아 있다. 모두 교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