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교사라는 말을 자주 쓴다. 어떤 단체나 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사람을 중견이라 하듯, 학교에서 제법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명시적인 지위가 없다. 실체도 없다. 그저 나이로 보아 지긋할 때 중견 교사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중견 교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제법 무게감이 실린다. 적어도 중견 교사는 젊은 교사보다 전문성이 뛰어나고, 그들보다 나은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수업 등에서 보이는 전문성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배어 있어야 하고, 인품도 남다른 면이 있기를 바란다. 중견 교사는 젊은 교사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학생들에게 인기도 있어야 한다는 잣대를 두고 있다. 그야말로 실력과 멋이 함께 있으면 좋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 멋은커녕 지탄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사람들이 모두 나이를 넘지 못하듯, 중견 교사도 마찬가지다. 젊었을 때는 열정을 보이며 동료들과 선배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나이 앞에서는 무뎌졌다. 체력은 물론 인지적 능력까지 떨어져 배우고 가르치는데 집중하기 쉽지 않다. 나이는 참 위험한 구석이 있다. 간혹 자기 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우산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힘든 일을 피하고, 오직 알량한 예우를
우리 사회에서 ‘수저론’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직업, 경제력 등으로 본인의 수저가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이 말은 작년부터 취업이 어려운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하면서 공감을 많이 얻고 있다. 즉 자신은 부모의 직업이나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해 ‘흙수저’라는 것이다. 반면 부모의 직업이 좋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자녀들은 취업 등의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격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상상을 해 보면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은 어떤 수저를 가지고 태어났을까. 왕족이었으니 당연히 금수저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은 조선 건국의 주역이면서 홀대를 받았다. 결국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은 조선 건국 공신들과 대립하며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가 세종이 네 살이었다. 태종은 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신권 정치의 도전을 받았고, 이를 누르고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를 확립했다. 그 중에는 처남들의 공이 컸다. 민무구, 민무질은 모두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동생들이자 세종의 외삼촌들이다. 하지만 정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서울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사람도 서울 나들이를 하면 꼭 들르는 곳이다. 우뚝 솟은 광화문을 보며 우리 민족이 극복해온 역사를 떠올린다. 외국인도 넓은 길에서 바라보는 광화문에 감탄을 한다. 북악산 기슭에 안겨 있는 궁궐의 문을 사진에 담기에 바쁘다. 광화문은 원래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었다. 태조 때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세종 때(1425년) 광화문으로 바꿨다. 광은 빛나고 밝고 크고 바르다는 뜻으로 ‘이 문으로 나가는 명령과 교서가 모두 바르고 크고 빛나서 만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광화문에는 ‘나라의 덕치와 문화가 천하 만방에 널리 미치게 하는 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요즘 이 광화문 현판이 논란이다. 6년 전 광복절에 사진 등 자료를 근거로 복원을 했다. 그런데 최근 다른 사진이 발견되어 현판 바탕과 글자 색상 문제를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는 보도다. 이를 두고 치밀한 조사를 통한 문화재 원형 복원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런 논란은 결국 정확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현판에 대한 명확한 자료만 있었다면 당연히 생기지 않았던 문제다. 반면 정확한 자료
며칠 전에 지인이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잡지사 기자가 내 글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기자와 친구처럼 지낸다며 원고 청탁이 오면 받아 주라는 부탁을 했다. 간혹 원고 청탁을 할 때 직접 연락이 오기도 하지만 이렇게 인맥을 동원해 외압(?)으로 밀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교육 전문 잡지라는 이야기에 내심 기대를 했다. 전화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기자가 전화를 했다. 교육 전문 잡지를 창간했는데, 특집에 나를 모시고 싶다는 황송한 말씀을 한다. 특집에 맞게 글의 주제도 까다로웠고, 원고 매수도 많았다. 원고 청탁은 받으면 묘한 감정이 만들어진다. 청탁을 받는 순간은 작가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에 가슴이 부풀기도 하지만, 막상 글을 쓰다가 글이 마음대로 안 풀리면 산더미 같은 후회를 한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잡지 창간호 특집에 실리는 글이라는 부담감이 오히려 기대감을 갖게 했다. 청탁을 받고 글을 쓰는데 연락이 왔다. ‘수업’이 특집이지만 필자가 여럿이기 때문에 내용이 겹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배움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수업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수업에서 실패했던 이야기 중심
구두를 새로 샀다. 새 것이어서 빛이 나고 멋있다. 발도 편하다. 뒷굽이 온전해서 키도 커 보인다. 걸을 때마다 소리도 크다. 새 구두를 신으니 기분도 들뜨고 걸음걸음이도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다. 구두가 낡았다고 아내가 진작부터 핀잔을 줬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래된 느낌은 있을지언정 낡지는 안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오래된 만큼 익숙함이 좋았다. 나란 위인은 워낙 새것에 둔감하다. 새것을 자유롭게 부리지 못하는 능력 탓이다. 그러다보니 구두도 오래 신었다. 그뿐이 아니다. 애정도 깊다. 오래된 구두는 일상에 허덕이는 나를 분신처럼 받쳐주고 있었다. 아침마다 힘차게 출발하는 길에 동행을 했다. 매일 남 몰래 찬란한 꿈도 담았던 신발이다. 값어치가 없어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헌신짝이라고 하지만, 지금 신발은 버리기 아깝다. 신발은 삶의 수고를 감내하고 왔다. 뙤약볕이 숨을 찌르는 날에도 소나기가 분노처럼 내리는 날에도 묵묵히 함께 걸어왔다. 왠지 울어버리고 싶은 만큼 힘겨운 날에는 터벅터벅 소리를 크게 내면서 나를 위로 했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신발을 보는 습관이 있다. 신발은 그 사람의 인간됨을 이끄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가에서 서술형 평가 및 수행평가 중심 방안이 강조되고 있다. 21세기 교육의 핵심역량인 의사소통능력, 협업능력, 창의력, 비판적 사고능력 등을 기르기 위해서는 평가 장면이 이렇게 가야 한다. 교육부가 지난 3월 4일 학교생활기록부 작성 및 관리지침(교육부 훈령)의 개정을 추진해 수행평가 비중의 확대를 유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는 서술형 문항의 출제 비율을 일정 이상 확보하도록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중에 서술형 평가 문항은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있다. 수행평가와 달리 출제 문항 설계를 하는데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학생들은 점수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커서 부담을 느낀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문제는 역시 수업이다. 수업에서 학생들의 창의력을 키우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수업에서 학생이 배우고, 배운 것을 요약, 서술, 토론, 말하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실행한다. 창의성 신장을 도모하기 위한 수업활동을 경험한 학생들은 서술형 평가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이 과정이 그대로 평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정 중심의 수업 밀착형 평가다. 서술형 평가 문항의 제작도 수업의 목적과 목표를 확
요 며칠 신문과 방송에 새로운 것이 오르고 있다. 바둑 이야기다. 그것도 일반적인 바둑 이야기가 아니다. 프로기사 이세돌과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 즉 사람과 기계의 대결이다. 대국이 끝나고도 후속 보도가 따르고 신문에도 연일 전문가 칼럼이 실린다. 솔직히 말하면 이 대결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흔들지 몰랐다. 평상시에 바둑이 우리 사회의 중심에 자리한 적이 없었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 구도에도 익숙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AI는 조류 독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알파고에 대한 지식이 없다. 아는 것이 없으니 재미를 발견하기 어렵고 관심도 없었다. 경기란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때로는 패자의 눈물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 경기는 그런 기대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기계의 바둑 실력을 얕보고 있어서 더욱 흥미가 없었다. 내 관심과 달리 세상은 세기의 대결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결과도 의외였다. 신문에서 방송 뉴스에서 인공지능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이 생산되고 있다. 통찰력과 직관력은 인간 고유 영역으로 기계가 그 영역을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알파고가 그것을 뒤집었다는 기사다
교실에 신문 기사가 붙어 있다. 내용은 2016학년도 대입 수능 만점자 이야기다. 만점자 16명 중 재수생이 7명인데 이들 이야기다. 한 학생은 고3 때 수능에서 전 영역 1등급 성적을 받고서 지방대 의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쉽게 출제된 수능 점수에 승복할 수 없어서, 재수를 하고 이번 수능에서 만점을 받고 서울대 의대 정시모집에 합격했다. 다른 학생도 마찬가지다. 고3 때 응시한 수능에서 일부 과목을 2등급, 4등급을 받았다. 그는 원서도 넣지 않고 다시 시험보기로 결심했다. 이번 수능에선 만점을 받고 서울대 의대 정시모집에 합격했다. 인문계 여학생은 국어B에서 2등급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역시 만점이었다. 다른 학생도 일부 교과에서 만족한 등급을 받지 못했지만, 다시 도전하면서 만점을 받았다. 수능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기사는 곧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실력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다. 만점자들은 하나같이 쉬운 수능일수록 실수 않는 게 실력이라고 말한다. 해서 시간을 재면서 같은 문제를 반복해 풀었다. 그리고 앞으로 쉬운 수능 기조가 이어질 것이므로 가급적 실수를 최소화하고 취약 과목에서 점수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월인석보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御製序文)에도 어리석은 백성을 불쌍히 여겨 문자를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고등학교에서는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만든 것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이러한 창제 동기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인류의 지적 유산으로 평가받는 한글 창제의 동기를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추상적이고 단편적이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고 그로 인해 문자를 만들기까지는 나름대로 구체적 배경이 있다. 조선은 경제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이른바 중농주의다. 당시 조선은 대다수 백성들이 농업에 종사했다. 따라서 농업을 장려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경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1429년(세종 11) ‘농사직설’은 이런 배경 때문에 만든 책이다. 전국 각 지방에 사는 늙은 농부들의 경험적 지식과 비결을 수집하고 체계화하였다. 중국 중심의 농업 기술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기후, 토질 등에 맞는 농업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당
미국의 영향력 있는 시사문예지 ‘뉴요커(The New Yorker)’ 온라인 판에 한국의 노벨문학상 열망을 비판적으로 전한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내용은 한국인이 책을 안 읽으면서 노벨문학상을 원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뉴욕타임스 등에 글을 쓰는 문학평론가이자 뉴욕 공영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마이틸리 라오다. 그는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부터 언급했다. 한국인의 문자 사랑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요즘 한국의 실상은 세종대왕 때와 다르다고 했다. 한국에서 매년 4만 권의 책이 출간되지만 한국인들이 얼마나 읽는지는 미지수이며, 1인당 독서량도 경제 규모 30개 나라 중 꼴찌라는 2005년 통계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직전 고은 시인을 두고 벌어지는 소동을 자세히 전했다. 노벨상 발표 때에 우리나라에서 고은 시인이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취재하는 언론을 두고 일침을 논 것이다. 매우 부끄러운 기사다. 한국인이 경제 규모에 비해 책을 읽는 인구가 적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비춰진다. 시인 고은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사실이다. 하지만
며칠 전 동료 선생님들과 식사를 했다. 학교도 뭐가 그리 바쁜지 오래 전부터 하자던 모임을 어렵게 했다. 내친 김에 카페에서 커피를 앞에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란 위인은 워낙 말이 없는 탓도 있지만, 나이 먹고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이날도 나는 주로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들이 집안 이야기를 하면, 크게 공감하고 짧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젊은 여선생님이 블로그 이야기를 할 때도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맞장구를 치고, 웃는 것으로 내 역할을 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선생님이 “수석선생님도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그러시나요?”라고 묻는다. 여 선생님의 질문은 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없이 앉아 있는 나에게 그냥 인사치레로 물었다는 느낌도 있었다. 순간 짧게 답하는 것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에서 말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가끔 좋은 글은 꼼꼼히 읽고, 피드백을 한다는 답을 했다. 교육 관련 콘텐츠가 풍부한 블로그도 소개했다. 그랬더니 놀라는 표정으로 “신세대시네요!”라고 규정한다. 순간 오기가 나서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고, 페이스북과 연동되어 있어 방문객이 많다는 자랑을
주유소에 가면 괜히 우쭐했다. 들어가기 전부터 차를 유도하며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양한 서비스를 척척 해준다. 기름을 넣는 동안에 차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 준다. 친절한 아가씨는 차 안에 쓰레기도 버려준다고 말을 건넨다. 차 안에 쓰레기는 없지만, 간혹 버려야 할 것이 있을 때가 있다. 그때는 참 고맙기까지 하다. 기름을 다 넣고 계산을 끝내면 휴지며, 생수까지 준다. 어디 그뿐인가 세차를 무료로 할 수 있는 쿠폰까지 준다. 겨우 몇 만원 넣는데 서비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주유소가 갑자기 셀프 서비스 체제로 바꿨다. 이제 종업원이 없고 소비자가 직접 기름을 넣어야 한다. 처음에는 기계 다루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기름이 묻을 것을 걱정을 했다. 하지만, 주유 과정이 간단하기 때문에 이내 마음이 놓였다. 차에서 내려 직접 기름을 넣는 것이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우였다. 무엇보다도 셀프서비스로 바꾸면서 가격을 내렸다고 하니 그것이 반가웠다. 그런데 셀프 주유소가 누구를 위한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셀프로 기름 값을 내렸다고 하는데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따라 기름 값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독서와 어울린다는 뜻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가을에 독서를 갔다 붙인 것은 가을이 주는 정서와 연관될 것이다. 가을은 만물이 성장을 다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그것이 매년 반복되는 자연의 이치라고 해도 쓸쓸하고 외롭다. 이 시간에 인간은 더욱 고독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곧 겨울이 오는데 시무룩하게 찬바람만 빈 가슴을 스친다. 이때 책 한 권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줄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삶이 공허해지기는 마찬가지다. 내게 남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보자. 그냥 읽고 지나치면 마음속에 아련하게 남는다. 하지만, 감상문을 쓰면 사고와 사색을 할 수 있다. 지식과 감동을 사고하고 사색하여 글로 남기면 풍부한 생활과 건전한 인격을 가꿀 수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독서 후의 느낌이나 감상을 자신의 생활 및 사고와 결부시켜 비판적인 독서 태도를 가지게 해야 한다. 독서감상문은 보통 읽은 책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쓸 수 있는 글이다. 일종에 수필이다. 흔히 수필은 무형식이 형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독서
최근 일부 식당이나 카페에서 어린아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No Kids Zone)’을 운영하고 있다. 실내에서 돌아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대화에 방해를 받아 손님들이 주인에게 항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음식점도 마찬가지다. 점잖은 사람들만 온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은 출입문에서 제지한다. 어린아이의 출입을 제한하는 데는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카페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아이들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얼마 전에 식당에 갔다가 이런 경험을 했다. 교외에 자리한 음식점은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한쪽 칸막이가 있는 곳에 자리를 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어린아이들의 장난이 심했다. 음식점에서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른다. 내심 부모가 말렸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급기야 종업원이 음식을 나르다가 부딪쳐 위험한 상황까지 갔다. 그때서야 부모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아이들을 다그쳤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였다. 아이들은 앉아서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는데 떠드는 소리에 거친 기계 소음까지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보면 어린아이들의 식당 등의 출
요즘 ‘개천에서 용이 안 나온다’라는 비유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린다. 변호사 협회와 로스쿨 진영이 사법고시 존치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사법고시 제도를 그대로 둬야 한다는 측은 이 제도가 있어야 그나마 개천에 용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사법고시 응시는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으로 합격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 말이다. ‘개천에서 용 나온다’라는 표현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말이다. 산업 사회에서 모두가 어려울 때 소수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했을 때 한 말이다. 특히 사법고시 시험은 학력 제한 도 없고, 한번 통과하면 미래가 보장되는 제도였다. 속된 말로 찢어지게 가난하다가 법관이 되고 사법시험 합격으로 권력과 부를 쥐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산업 사회가 몰락하고 사회가 급변하면서 개천에서는 용이 안 나온다고 한다. 사회의 경쟁 시스템이 주로 ‘가진 자’ 위주로 진행되다보니 개천에서 태어난 사람은 애초부터 계층 상승이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젊은이들이 취업이 어려워 삼포 세대, 오포 세대, 칠포 세대라고 울부짖고 있다. 이 와중에 국회의원들이 자녀 취업을 위해 대기업에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종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