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서울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사람도 서울 나들이를 하면 꼭 들르는 곳이다. 우뚝 솟은 광화문을 보며 우리 민족이 극복해온 역사를 떠올린다. 외국인도 넓은 길에서 바라보는 광화문에 감탄을 한다. 북악산 기슭에 안겨 있는 궁궐의 문을 사진에 담기에 바쁘다.
광화문은 원래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었다. 태조 때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세종 때(1425년) 광화문으로 바꿨다. 광은 빛나고 밝고 크고 바르다는 뜻으로 ‘이 문으로 나가는 명령과 교서가 모두 바르고 크고 빛나서 만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광화문에는 ‘나라의 덕치와 문화가 천하 만방에 널리 미치게 하는 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요즘 이 광화문 현판이 논란이다. 6년 전 광복절에 사진 등 자료를 근거로 복원을 했다. 그런데 최근 다른 사진이 발견되어 현판 바탕과 글자 색상 문제를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는 보도다. 이를 두고 치밀한 조사를 통한 문화재 원형 복원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런 논란은 결국 정확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현판에 대한 명확한 자료만 있었다면 당연히 생기지 않았던 문제다.
반면 정확한 자료가 있는데도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문화재가 있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 있는 앙부일구다. 이는 측우기, 혼천의와 나란히 서 있는데 세종의 애민정신이 깃들여있다. 세종은 백성이 시간을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래서 한자 대신 12간지에 해당하는 동물 그림으로 시각을 표시했다. 한 마디로 앙부일구는 백성들을 위한 시계였다.
세종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임금이다. 한글 창제도 애민정신이 낳은 유산이다. 세종실록(1423년)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라고 말한 내용이 전한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천민들에게도 산후 휴가를 보내는 정책을 시행했다. 세종은 군왕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불편한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을 했다.
앙부일구의 시계에 그림을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종이 백성과 소통을 시도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만든 것이다. 중세 왕조 사회에서 백성의 어려움을 읽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지배층을 중심으로 독점하고 있는 문자를 피지배층인 백성과 함께 하려는 시도도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시도가 결국은 훈민정음 창제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세종의 노력이 후손에게 기억되어야 한다.
앙부일구는 광장에서 지하로 연결되는 세종이야기 전시관에도 있다. 이곳은 세종대왕의 출생부터 세종이 이뤄낸 과학과 예술 군사 정책을 비롯하여 한글 창제 업적까지 전시를 하고 있다. 여기에 앙부일구를 복원해 놓았는데 역시 엉터리다. 동물 그림이 없다. 전시물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문자판에는 한문 대신 12시(時)를 나타내는 12지신 동물의 그림을 그려 넣어 백성들이 시각을 쉽게 알 수 있게 배려했다.’라는 설명은 있지만, 정작 만들어놓은 해시계는 한자만 있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앞에 천문 기기 설치는 관광객을 위한 것이다. 지하 전시관에 각종 설치물도 관광과 교육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설치물은 세종 당시의 모습으로 정확히 복원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앙부일구에 시각 표시에 동물 그림을 복원하는 것은 과거의 유물을 그대로 복원하는 차원 이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는 세종이 문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그림을 그려 소통하려 했던 정신적 유산까지 복원하는 길이다.
몇 년 전 숭례문이 불에 타고 복원 사업이 거국적으로 시행됐다. 하지만 결과는 부실 복원이었다. 시간을 정하고 눈에 보이는 업적을 중요시 하다 보니 중요한 원형 복원이라는 정신을 놓쳤다. 문화재 복원이나 보수는 원형 보전이 생명이다. 현재 광화문에 있는 앙부일구는 역사와 세종의 정신을 왜곡하는 것으로 당연히 철거되어야 한다. 앙부일구를 세종실록 등의 기록을 이용해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