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개천에서 용이 안 나온다’라는 비유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린다. 변호사 협회와 로스쿨 진영이 사법고시 존치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사법고시 제도를 그대로 둬야 한다는 측은 이 제도가 있어야 그나마 개천에 용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사법고시 응시는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으로 합격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 말이다.
‘개천에서 용 나온다’라는 표현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말이다. 산업 사회에서 모두가 어려울 때 소수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했을 때 한 말이다. 특히 사법고시 시험은 학력 제한 도 없고, 한번 통과하면 미래가 보장되는 제도였다. 속된 말로 찢어지게 가난하다가 법관이 되고 사법시험 합격으로 권력과 부를 쥐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산업 사회가 몰락하고 사회가 급변하면서 개천에서는 용이 안 나온다고 한다. 사회의 경쟁 시스템이 주로 ‘가진 자’ 위주로 진행되다보니 개천에서 태어난 사람은 애초부터 계층 상승이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젊은이들이 취업이 어려워 삼포 세대, 오포 세대, 칠포 세대라고 울부짖고 있다. 이 와중에 국회의원들이 자녀 취업을 위해 대기업에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종 음서제도라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강남에서만 용이 난다’, 애초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야 한다. 흙수저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조사한 자료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느낀다. 2015년 7월 27일부터 8월 5일까지 ‘계층 상승 사다리에 대한 국민 인식’을 전국의 20대 이상 성인 남녀 810명을 상대로 유선 전화로 설문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개인이 노력할 경우의 계층 상승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81.0%가 ‘가능성이 적은 편’이라고 답했다. 국민 10명 중 8명은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계층 상승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 것이다. 2013년 설문 조사 때는 75.2%였는데, 이번에는 부정적인 응답률이 5.8%포인트 상승했다. 전 연령층에서 부정적인 응답률이 올랐는데, 20대 청년층의 부정적 응답률은 70.5%에서 80.9%로 늘어 가장 큰 폭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런 결과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사 자료에서 언급했듯이 청년층의 실업률과 비정규직 비중이 상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택 구입비 부담도 중산층 수준의 삶을 누리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 듯하다. 기타 보육비와 사교육비로 힘겨워하는 서민층들은 부정적인 답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구원이 조사한 설문 조사를 보도하면서 언론들은 표제어로 역시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들다’라는 식으로 뽑았다. 소득 상승이 곧 계층 상승이고, 여기에서 실패하면 ‘용’이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인식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사고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개천의 개념은 둘째 치고 과연 용의 개념이 무엇인지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에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용이 되는 길이었다.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축에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 현상이 다변화됐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에 노력을 기울여 남다른 성과를 보이는 사례가 많다. 스포츠 분야에서 실력을 보여 대중의 사랑을 받는 선수들이 많다. 이들은 이미 어린아이들의 성장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한류를 이끄는 K-pop 스타들도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용이 된 사례로 충분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기 분야에서 묵묵히 성과를 내는 사람들은 모두 용이 된 것이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성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고학력으로 좋은 직장에서 일하면 그것이 곧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스포츠 스타와 아이돌 가수들을 성공의 모델로 삼는 것도 권하지 않는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을 지니고 꿈을 키워 가면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 자신의 삶에서 책임을 다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용이다.
물론 우리 사회가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그로 인한 삶의 무게를 심하게 느끼는 계층들이 많다. 그래서 연애, 결혼, 출산까지 포기하는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절망적인 상태까지 왔지만, 희망은 포기할 수 없다.
언론들이 양극화되는 사회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천’이나 ‘용’을 들먹이면서 팍팍한 이 시대를 더욱 메마르게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빈부의 대물림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정책 담당자들이 섬뜩하게 놀랄 정도의 붓을 휘둘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