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월인석보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御製序文)에도 어리석은 백성을 불쌍히 여겨 문자를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고등학교에서는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만든 것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이러한 창제 동기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인류의 지적 유산으로 평가받는 한글 창제의 동기를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추상적이고 단편적이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고 그로 인해 문자를 만들기까지는 나름대로 구체적 배경이 있다. 조선은 경제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이른바 중농주의다. 당시 조선은 대다수 백성들이 농업에 종사했다. 따라서 농업을 장려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경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1429년(세종 11) ‘농사직설’은 이런 배경 때문에 만든 책이다. 전국 각 지방에 사는 늙은 농부들의 경험적 지식과 비결을 수집하고 체계화하였다. 중국 중심의 농업 기술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기후, 토질 등에 맞는 농업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당시 재배하던 벼, 콩, 조, 피, 수수, 보리 등 주요 곡물의 종류 및 재배법과 씨앗 저장법, 토질 개량법, 묘판 만드는 법, 모내기법, 거름 주는 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정부는 이 책을 주도적으로 간행하여 도의 감사와 주·부·군·현 및 경중(京中)의 2품 이상에게 널리 나누어 주었다.
책을 만들어 관리들에게 배포한 것은 그들이 내용을 백성에게 자세히 전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백성이 글을 알았다면 내용 전파는 쉽게 되었을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도 세종은 백성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세종대왕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백성이 평안해야 한다. 억울한 백성이 없고 태평한 세상, 이것이 바로 세종대왕이 꿈꾸던 조선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전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진주에서 아들이 어미를 구타하였다는 내용이다. 부모에게 패륜을 저지른 일은 유교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세종은 백성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삼강행실도’를 편찬한다. 1434년(세종 16) 직제학(直提學) 설순(偰循) 등이 왕명에 의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의 덕목을 담았다. 그 내용은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았다. 이를 통해 백성들의 윤리적 기강 확립을 꾀하려 했다.
진주의 사건에 대해 엄벌의 주장이 논의될 때, 세종은 엄벌에 앞서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간포해서 백성들에게 항상 읽게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래서 문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그림책을 편찬한다. 그것이 ‘삼강행실도’이다.
같은 해 10월에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仰釜日晷)도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는 조선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해시계로 중국의 앙의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오목한 솥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앙부일구라고 했다.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치어 시간을 알 수 있다.
앙부일구는 종로 혜정교와 종묘에 설치했다. 어린이도 볼 수 있게끔 낮은 2단으로 계단식 받침돌 위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각종 기호는 한자로 되어 있으나 핵심 시각 표시는 하층민을 위해 열두 띠 동물시신 기호를 아울러 표시했다.
앞에 역사적 사건들은 언어생활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의미가 있다. 지배자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을 마음대로 운용하는 전제 국가에서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꾀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소중하고 탁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가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동기로 이어졌다.
특히 삼강행실도가 4월 27일 간행되었고, 동년 10월 2일자 실록에 앙부일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전한다. 그렇다면 이 기록이 씌어 있는 1434년은 문자 생활사와 관련시켜 볼 때 무척 중요한 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434년을 세종이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을 연구하기 시작한 해로 볼 수 있다. 즉 세종은 이때부터 훈민정음 창제에 몰두해 10여년이 지난 1443년에 창제를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보다 그 실체를 정확하고 깊게 알고 있을 때 우리의 세계는 달라진다. 대상에 대한 이해의 증진으로 의식이 성장하고 마침내 깊은 애정을 갖는다. 한글은 우리 조상이 남겨준 문화유산이다. 한글은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잊고 산다. 관심이 대상을 아는 첫걸음이다. 우리가 아는 한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끊임없이 성찰을 통해 관심을 키워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