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로 인해 폭우가 쏟아졌다. 학교에 큰 피해는 없어 다행이다.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폭우가 내리면 주말이 없다. 늘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인다. 아무리 물이 필요해도 지나치면 안 되겠다 싶다. 피해를 줄 정도면 적게 온 것만 못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생각난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는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기에 정도에 지나치는 것은 피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1741-1739)의 시를 읽었다. “농부의 별은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이고/ 안개 뚫고 서리 맞으며 동편 논으로 나간다./ 시고 짠 세상맛은 긴 가난 탓에 실컷 맛보았고/ 냉대와 환대는 오랜 객지생활에서 뼈저리게 겪었지./ 부모님 늙으셨으니 천한 일을 마다하랴/ 재주가 모자라니 육체노동하기 딱 어울린다./경략의 달변이 없으니 이를 문질러 잡으랴 /온화한 낯빛으로 촌 노인네 마주해야지.”
이 시를 읽으면서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다. 이덕무는 시인이자 실학자인데도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었다. 농부로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인 ‘근면’을 가지고 있었다. 농부 하면 근면이고 성실이다. 선생님 하면 역시 근면이고 성실이다. 농부의 별이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이듯이 서툰 시인인 농부에게도 부지런함이 번뜩인다.
농사를 짓는 게 많지 않아 새벽에 들녘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새벽을 깨우며 들로 나가는 이가 농부다. 우리 선생님들의 모습도 이와 많이 닮았다. 새벽 같이 출근을 하시지 않아도 되는데 아침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고 차 안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는 선생님도 계시고 어떤 선생님은 그렇게 일찍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하신다. 어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라면으로 아침을 때운다. 오직 학생들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별은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부는 안개 뚫고 서리 맞으며 동편 논으로 나간다. 안개는 주로 새벽에 많이 낀다. 선생님들은 새벽을 깨우는 선비다. 일터인 학교를 새벽부터 나온다. 학교에 온다고 해서 달고 맛있는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고 짠맛만 기다린다. 그래도 서둘러 출근한다. 학생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다.
학교에 오면 언제나 환대를 받는 것 아니다. 냉대를 받기도 한다. 학생들이 인사를 하지 않고 외면할 때도 있다. 선생님들끼리도 따뜻하게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관리자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는다. 쓴맛을 볼 대로 다 본다. 그래도 조금도 굴하지 않는다. 참고 잘 이겨낸다. 오직 냉대를 양약으로 삼는다.
시인은 부모님을 효도하는 정성이 극성스럽다. 부모님이 늙으셨으니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땀 흘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박봉에도 땀 흘리는 선생님들이 많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려야 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기쁨으로 한다. 원망,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의 롤 모델이 아닌가 싶다.
또 시인에게서 겸손의 미덕을 찾아볼 수 있다. 재주가 탁월한데도 재주가 모자라 농사짓는다고 하고 달변이 아니니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노래하였다. 재주가 없으면 학자가 될 수도 없고 선비도 될 수 없다. 시인도 될 수 없고 문장가가 될 수 없다. 이런 재주를 가졌어도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본을 받을 만하다. 우리 선생님들은 실력이 출중하신데도 겸손의 미덕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덕무 시인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시인에게서 배울 점은 이웃 어른들은 존경하는 마음이다. 온화한 낯빛으로 촌 노인네를 맞이하고자 하는 마음자세가 밤하늘의 달빛처럼 너무 빛난다. 우리 선생님들의 어른 공경의 마음과 흡사하다 싶다. 학생들이 웃어른 공경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다 선생님의 영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