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11.15 (금)

  • 맑음동두천 10.9℃
  • 구름많음강릉 16.0℃
  • 맑음서울 14.0℃
  • 맑음대전 13.2℃
  • 맑음대구 13.6℃
  • 구름많음울산 17.4℃
  • 맑음광주 14.1℃
  • 맑음부산 19.2℃
  • 맑음고창 11.3℃
  • 맑음제주 19.9℃
  • 맑음강화 12.4℃
  • 맑음보은 11.3℃
  • 구름조금금산 7.5℃
  • 맑음강진군 15.9℃
  • 구름조금경주시 14.7℃
  • 맑음거제 17.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교단일기

사료에 나타난 우리땅 독도!

8월15일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 방문으로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독도에 대한 대내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은 극우단체를 중심으로 기습적인 독도 상륙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따라서 리포터는 우리 역사에 나와있는 독도에 대한 기술들을 살펴보았다. 역사서에 나와있는 것처럼 독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엄연한 우리 땅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은 우리 사료에 나타난 독도에 대한 기록이다.

독도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1145년)이다. 여기에는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킨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본래 삼국시대 이전에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국으로 불렸다. 삼국시대에 우산국 사람들이 신라내륙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벌이자 신라의 이찬伊飡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게 되었다. 우산국 사람들은 지세가 험해 신라가 쉽게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믿었으나 이사부가 계략을 써서 우산국 사람들을 복속시키고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 본기 4 지증마립간 13년 512년 6월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지증왕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이 항복하고 매년 토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쳤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1백리이다. 우산국사람들이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자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성질이 사나워 위엄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려우니 꾀를 써서 복종시키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로 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는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복종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놓아 밟혀죽게 하겠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두려워서 바로 항복하였다.

고려시대의 울릉도와 독도 512년에 신라에 복속된 우산국은 918년에 고려가 세워진 이후 고려의 지배를 받았다. 930년 태조 13년에 우산국은 백길과 토두라는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고 고려는 이들에게 관직을 주어 복속 상태를 유지시켰다.

1018년 현종 9년에는 우산국이 동북지방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왕이 농기구와 종자 등을 하사했다. 그리고 1032년 덕종 1년에도 우릉도(羽陵島) 성주가 아들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그 후 1157년 의종 11년에 왕은 명주도 감창(監倉) 김유립을 파견하여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켜 살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김유립은 울릉도의 면적과 촌락 터 유적지 산물 등을 조사하고 돌아와 왕에게 울릉도는 바위가 많아 주민을 이주시켜 살게 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 후에도 고려조정에서는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자 여러 번 시도했으나 도중에 풍랑으로 인한 익사자가 많아 중단시켰다. 울릉도는 주민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을 지니고 있는 데다 왜인들의 침입도 그치지 않았으므로 중앙정부는 울릉도에 이따금 안무사(按撫使)를 파견하여 섬을 관리했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울릉도가 우릉도 무릉도로, 독도가 우산으로 나타나있다. 고려사 지리지(1451년)에는 울릉도와 독도는 다른 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울릉도와 독도

조선시대에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많다. 울릉도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울릉도와 주변 섬에 관한 보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로서는 주민들이 울릉도에 들어가 사는 일을 방관할 수 없었다. 울릉도 주민은 왜구의 약탈 대상이 되기 쉬웠고 한편으로는 정부의 세금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간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울릉도에 대해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하였다. 그로 인해 울릉도가 일시적으로 무인도가 되었지만 이는 정부가 울릉도와 주변 섬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일 뿐 섬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사람들은 정부의 쇄환정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울릉도로 들어갔으므로 섬이 빈 적은 거의 없었다. 당시 섬을 조사하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의 직함은 '무릉등처안무사(武陵等處按撫使)' 혹은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였다. 관직명에 '우산'과 '무릉', 두 섬 이름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울릉도뿐만 아니라 우산도에 대해서도 조사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정부는 3년마다 수토관(搜討官)을 파견하여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제도화했다.

쇄환정책이나 수토정책은 공도정책(空島政策)과는 구별된다. 이들 정책은 국가가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관리정책이다. 하지만 공도정책은 '공도화(空島化)'를 섬의 포기와 결부시키기 위해 주로 일본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두 섬의 거리관계를 나타낸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초기에 정부는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작업에 착수했는데 신찬팔도지리지에 울릉도와 우산도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기술의 중요성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이 별개의 섬임을 말해주고 있다. "두 섬은 서로의 거리가 멀지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두 섬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므로 흐린 날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고있다.

울릉도 주변의 부속도서 중에 관음도와 죽도라는 섬이 있다. 관음도는 울릉도 끝 부분 섬목에 가까이 있는 섬으로 일명 깍새섬이라고도 한다. 죽도는 울릉도 북동쪽으로 4km, 배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섬으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대나무가 많아 '댓섬'이라고도 불렸는데 한자로는 '竹島(죽도)'로 표기한다. 그런데 이 섬들은 맑은 날이 아니더라도 울릉도의 어느 방향에서나 대부분 잘 보인다. 따라서『세종실록』지리지에 두 섬이 날씨가 맑은 날에만 보인다고 한 우산도는 관음도 나죽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킨 사실 등이 기술되어있어 울릉도와 우산도가 예로부터 중요한 섬으로 인식되어 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