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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한겨울, 내소사의 풍경소리


표를 산 다음 매표소를 지나 절 입구에 들어섰다. 제일먼저 청아한 스님의 독경소리와 목탁소리가 길옆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독경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길을 걷는다. 특이하게도 사찰로 들어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구 전연 가파르지가 않다. 대로처럼 넓게 펼쳐진 길 양옆으로는 전나무 숲길이 인상적이다. 마치 오대산 월정사의 키다리 전나무숲길을 걷는 느낌이 든다.


하늘 찌를 듯이 늘어선 전나무들은 수령이 110년이 훌쩍 넘은 것들이라고 한다. 전나무들은 마치 방문객을 환영하듯 양손을 활짝 벌여 웅장한 터널을 만들어준다. 나무들이 만들어준 1km에 이르는 전나무터널을 걷다보니 속세의 미움도 애증도 봄눈 녹듯 사라지며 불국의 세계에 성큼 다가선 느낌이 든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나는 속으로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150년 전 후손들을 위해 친히 이 나무들을 심은 스님들께 감사함을 표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 공기는 속세와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진다.


한참을 걷다보니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큼지막하게 지어진 일주문이 길을 막는다. 능가산 일주문(一柱門)이다. 이 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오직 一心으로 부처님께 귀의하라는 뜻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우고 문을 지은 것이 일주문이다. 이제부터 이 문을 경계로 밖은 욕망의 속계이며 안은 부처님이 사시는 불국의 세계인 셈이다. 마치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건물처럼 일주문은 아름답고 신비롭게 기립해 있다.


전나무숲길이 끝나는 지점, 우리를 제일먼저 맞이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고목이다. 수령이 무려 950년! 찰나와 같은 사람의 일생에 비하면 그 얼마나 위대한 생명력의 소산인가. 내소사 안마당에 자리 잡은 할매당산나무는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거기에 그렇게 우뚝 솟아 있었다. 우리나라 가람에서는 느티나무를 무당나무라 해서 좀처럼 심지 않는 법인데, 이곳 내소사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느티나무를 절 안마당에 심었다. 그것도 절 입구에 한 그루, 절 안마당에 한 그루 해서 두 그루나 심었다.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일컬어 절 입구에 있는 것을 ‘할배나무’, 절 안쪽에 있는 것을 ‘할매나무’라 칭하며 매년 당산제를 올린다고 한다.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나는 서둘러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대웅보전은 수리가 한창이었다. 얼기설기 설치된 비계가 대웅보전을 어지럽게 감싸고 있어 안타까움이 컸다. 마치 대수술을 받는 중환자처럼 대웅보전은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조심스레 대웅보전 안쪽을 살펴보았다. 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아미타여래가 한가운데에 계시고 그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이 인자한 미소를 흘리며 앉아 계시다. 때마침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 맞춘 지붕에서는 희미한 후광이 비치는 듯하다.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부처님의 가호가 온몸에 스며드는 느낌이다.


대웅전을 나와 그 유명하다는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살창 문양을 구경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나무를 천연 나뭇결 그대로 살려 깎아 만든 것으로 꽃잎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여섯 개의 잎사귀를 기묘하게 맞춰나간 장신의 솜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대웅보전 안쪽에서 밖을 바라보니 꽃무늬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의 실루엣 문양만이 정갈하게 비쳐든다.


꽃살창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나선형으로 떨어지는 석양과 보조를 맞추어 산사의 고요한 정적을 깨고 범종루에서 두두 둥! 법고가 울린다. 때맞춰 진행되는 예불시간이다. 도량의 댓돌 위에는 어느 스님이 벗어 놓은 것인지 흰 고무신이 자로 잰 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지런하다. 고무신의 빛깔은 새벽이슬처럼 신선하고도 정갈하다. 너무 희어서 갓 삭발한 스님의 머리처럼 푸르스름한 빛까지 발광한다.


그런데 고무신 빛깔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곳 내소사의 역사이다.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백제 무왕 때 지어진 것이라니 어림잡아도 1300년은 훌쩍 넘은 가람이다. 물론 그동안 수많은 증개축이 있어 왔지만 대부분의 재료들은 아직도 천년의 세월을 품고 있다하니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역사가 유구한 가람이다.


이러한 역사를 증명하듯 내소사에는 전설이 참 많다. 대웅보전을 지은 청민선사의 이야기부터 관음조가 그린 단청까지 기이하고 의미심장한 전설들인데 인간의 의심과 이해타산을 경계하고 진리에 대한 참구야말로 지극한 불교의 길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내소사 삼층석탑.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나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높이는 3.46m이다.

면 아래의 받침대는 하나의 돌을 이용한 것이다.

몸체도 층마다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각 면마다 기둥을 새겼다.

몸체와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와 높이가 급격하게 줄었으며, 지붕들의 경사도 심한 편으로 날렵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다음은 청민선사와 대웅보전 증축에 관한 이야기다.

대웅전을 중수할 때 대목이 3년 동안 기둥, 서까래와 목침만한 나무토막만 깎아놓아 사미승이 장난삼아 나무토막 하나를 슬쩍 감추어 놓았다. 마침내 나무 깎기를 멈추고 대웅전을 짜 맞추는 날, 나무 한 조각이 부족한 사실을 안 대목수가 당황해 하며 주지스님에게 자신은 대웅전을 지을 자격이 못된다고 하며 포기하겠다고 고집한다. 이때 사미승이 감춰둔 나무조각을 내어놓지만 이미 부정탄 나무라하며 한 조각이 부족한 채로 대웅전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전 천장 우측에 나무 한 토막이 빠져있다고 한다.

대웅전 단청에 관한 또다른 전설도 있다. 대웅전이 완공된 후 한 단청장이가 찾아와 자신에게 단청을 맡겨주기를 간청한다. 단, 백일동안 아무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약속한 백일이 다 되도록 인기척이 없고 단청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지막 백 일째 되는 날 사미승이 문틈으로 몰래 엿보았더니, 새 한 마리가 부리에 붓을 물고 제 몸에 물감을 묻혀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기척에 놀란 새가 마지막 한 부분을 칠하지 못하고 그만 날아가 버려 지금도 법당 한곳에는 단청이 빠져 있다.


전설의 내용을 되새기며 주위를 둘러보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백팔 배를 드리는 신도가 여러 명 보인다. 백팔 배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성취시켜준다는 믿음 때문인지 많은 신도들이 각자의 소원 수대로 좌복(坐服)을 펼쳐놓고 예불 삼매경에 빠져 있다.

나는 따스한 겨울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한참동안이나 좌복 위에서 정성스럽게 오체투지를 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불전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절을 하는 저네들의 소원은 과연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저 아프지 않고 걱정 없이 하루 세 끼 맛있는 밥을 먹게 해주소서.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누어 가질 수 있고,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와 눈빛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고,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대할 수 있으며, 예의바르고 친절한 몸가짐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게 하소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사바하….


둥, 둥, 둥! 다시 저녁 예불을 알리는 북소리다. 나도 이젠 그만 하산을 서둘러야할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알싸한 피톤치드가 가득 섞인 내소사 경내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켜 본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였던 속세의 때가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와 함께 한순간에 녹아나는 느낌이다. 아, 바로 이것이다. 이 기분 때문에 나는 오늘도 고단한 몸을 이끌고 깊은 산사를 찾아 이리 헤매는 지도 모른다. 문득 하산을 서두르는 사람들 등 뒤로 청민선사의 인자한 가르침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

“선남선녀여, 하루 세 때 나를 돌아보고 남을 미워하기 보다는 내가 참회는 마음으로 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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