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광주시월수외국어학교(廣州市越秀外國語學校 - 중․고 통합)는 캠퍼스가 둘이었다. 처음 방문한 학교는 북캠퍼스였다. 전교생은 2,000명 되는데 두 캠퍼스에 1,000여명씩 나누어서 교육활동을 하고 있었다. 두 캠퍼스에 교장선생님은 한 분이셨다. 남캠퍼스에도 방문을 했는데 학교 크기는 비슷했다. 교장선생님께서 하루씩 돌아가면서 남, 북 캠퍼스를 오가고 있었고 교감선생님은 ‘부교장’이라고 부르는데 부교장선생님이 모두 4명이었는데 두 명씩 나누어서 근무하고 계셨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학교에 ‘서기장’이 계셨는데 학교를 관리하고 감독을 하신다고 하였다. 함께 가신 선생님께서 안내하는 선생님께 교장선생님과 서기장님이 누구 높으신지 물었는데 대답을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무실 배치를 보니 교장선생님이 근무하시는 교장실이 제일 왼쪽에 있었고 그 다음에 서기장님이 근무하시는 사무실이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40대이신데 서기장님은 5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첫날에는 담당부교장선생님께서 환영을 나오셨고 마지막날 돌아가는 날에는 서기장님이 나오셨다. 대충 직위와 맡은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다.
중국 광주시월수외국어학교(廣州市越秀外國語學校-북캠퍼스)는 학교건물이 아파트처럼 생겼다. 두 개의 교문이 없었다면 아무도 학교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변에는 아파트로 가득 찼다.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학교 건물에서 아파트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다. 학교 건물이 60년이 되었고 복도식 아파트로 연상하면 대충 이해가 될 것이다. 계단의 폭이 너무 좁았고 낡았으면 골마루의 폭도 좁았고 골마루 바깥 부분은 유리창도 없고 난간으로 설치되었으며 비바람이 바로 치게 되어 있었다. 너무 환경이 열악했다. 우리의 재건축 아파트로 생각하면 맞을 것 같다.
두 동의 건물 사이에는 통로가 있었고 교사동의 벽면에는 큰 글씨로 학생들에게 무언의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네 글자였다. 첫 자가 ‘존사(尊師)’였다. 다음은 ‘수칙(守則)’이었다. 한자가 중국식 간체자이기 때문에 조금 표기가 다르다. 교칙을 준수하는 것을 존사(尊師) 다음으로 중요시하였다.
첫째, 선생님을 존경하라. 선생님을 존경해야 교육이 제대로 된다. 교권이 확립되어야 바른 교육을 할 수 있다. 둘째, 교칙을 준수해라. 학교의 모든 교칙을 잘 지켜야 한다. 게시판에는 40개의 수칙이 적혀 있었다. 그 중의 제일 첫머리에는 애국심이었다. 나라 사랑, 국가 사랑, 국기 사랑, 국화 사랑이었다.
교칙 중에 특이한 것은 예절교육이었다. 학생들은 아침 7시부터 7시30분까지가 등교시간이었다. 아무리 일찍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7시가 되어야 문을 열어 주었다. 7시 30분이 되니 교문을 닫았다. 지각하는 학생들이 없었다. 두 번째 정문 옆에 숙소가 있어 학생들의 등하교와 선생님들의 지도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제1 교문에는 두 명의 경비가 서 있었고 안쪽인 제2 교문에도 두 명의 경비가 있었고 부교장선생님 한 명과 담당선생님, 그리고 선도부 학생들이 네 명씩 양쪽에 서 있었다. 남캠퍼스에도 그러했다. 교장선생님께 물었더니 예절교육 차원에서 그렇게 지도한다고 하였다.
학생들은 규칙을 잘 준수하였다. 등교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것도 그렇고 매일 있는 2교시 후 체조시간에도 그 좁은 골마루에서 두 명씩 짝을 지어 운동장으로 나오는 모습을 봐도 그러했다. 쉬는 시간에 장난하는 이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학생들의 머리는 남학생은 귀가 보이도록 단정하게 했고 여학생들은 머리를 묶었다. 인성교육이 잘 되어 있었다. 학생들의 교복은 체육복이었다. 실용적인 것을 택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을 보아도 역시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선생님 존경, 교칙 준수’ 이 두 가지만 잘 이뤄져도 우리 교육도 큰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