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광복절 68주년을 맞이했다. 광복이라는 어휘를 두고 해방(解放), 독립(獨立), 광복(光復)이라는 비슷한 명칭을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解放)이라는 것은 '해방하다'라는 타동사로 주인이 묶어 두었다가 풀어줄 때 사용하는 말이다. 마치 주인이 새장을 열어서 풀어줄 때 그 새는 해방되는 것으로 해방의 주체는 일본과 UN이 한국을 해방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속박(束縛) 또는 예속(隸屬)상태(狀態)에서 일본이 풀어 주어 자유를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의 힘을 입지 않고 홀로 서는 것을 독립(獨立)이라고 한다. 개인(個人)이 한 집안을 이루어 생계(生計)를 세우고 완전(完全)히 사권(私權)을 행사(行使)하는 능력(能力)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 나라나 단체(團體)도 대내(對內)ㆍ대외적(對外的)으로 완전(完全)한 주권(主權)을 행사(行使)하는 능력(能力)을 가지는 것이 독립이다. 우리나라는 개국 이래 이미 독립 국가였기 때문에 독립이라는 것도 어휘개념이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광복이라는 말은 '빛을 되찾다'라는 말로 일시적으로 일본에게 침탈당한 주권을 항거에 의해 되찾았기 때문에 옛일을 되찾았고 잃었던 주권을 되찾았다는 의미인 광복(光復)이 가장 주체성이 있는 어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를 자의적으로 풀어준 것이 아니라 연합군의 무력에 의해 일본이 패망해 항복에 의한 것이다. 일제에 강점당한 이전의 상태로 빛을 찾아 되돌렸다고 주장하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이 광복(光復)이라고 주장해 광복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정말로 옳은 생각이고 민족의 얼과 자존심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광복절 노래 가사는 물론 삼일절 노래, 제헌절노래, 개천절 노래 가사까지 모두 지은 분이시다. 위당(爲堂)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유길(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원용(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 호조참판을 역임한 은조(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師事)했다. 그의 문명(文名)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돼 국가의 주권이 손상 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 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했다고 한다.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해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해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했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했다.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조선고전해제」와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정약용(丁若鏞) 사후 실학연구를 주도했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때부터 사용됐다.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한문학의 대가로서 서지학, 국사학, 국문학에 두루 관여했다. 광복 후에는 국학 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고, 건국 후 초대 감찰 위원장직을 맡았다. 정인보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끌려가다가 그해 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름답고, 민족정신이 넘치는 당찬 노래와 ≪조선사연구≫·≪양명학연론≫·≪담원시조집≫·≪담원문록)≫·≪담원국학산고≫ 등 소중한 저서를 남겨주신 선생님이다.
정인보 선생님은 고조선으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른 고대사를 주로 연구했다. 선생님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을 계승해 '조선의 얼', '한국의 얼'을 강조했다. 그 얼을 잊지 않도록 우리의 역사와 글 그리고 말과 삶 속에서 평생을 바쳐 찾아내신 분이 바로 정인보 선생님이다. 대학자셨지만 평생 동안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집안에는 은수저 한 벌이 없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나라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따지지 말고,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그 분이며 해방절, 독립절이 아닌 광복절이라는 명칭을 남긴 정인보 선생을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