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엔 이게 무슨 시냐고, 이런 것도 무슨 문학이냐고, 한 때는 그렇게도 배부른 생각들을 했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같이 해묵은 용어들을 떠올릴 그런 힘겨운 투쟁의 현장들을 소소하게 일상의 언어로 나열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그런 시 아닌 시를 두고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안다. 적어도 의엿한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인 부를 지니지 못하고 늘 삶의 언저리에서 겉돌기만 하며 소위 말하는 0.001%의 화려한 삶에 보조를 맞춰주며 살아가는 현실이다 보니, 그나마 지금 내가 이렇게 편안하게(?) 살고 있는 삶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에 스스로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 종국엔 그들의 목숨마저도 초개같이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또한 말이다.
전쟁터도 아닌데 늘 피비린내가 떠나지 않는 삶의 현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최하층민들의 삶,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그들의 삶 속에서 난 들키고 싶지 않은 내 속 마음을 열어 보이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아프든 말든, 적어도 나라는 한 인간은 편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던 부끄러운 내 속 마음을 말이다.
작가의 체험은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물론 그 체험이 치열한 삶에서 온 것이라면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되는 것일 테다. 간척지 공사장 일용직 용접공, 석유화학단지 배관공 보조,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여러 삶의 현장들에서 고스란히 그의 몫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비정규직으로 전전해야 했던 송경동 시인은 우리가 기피했던 그 모든 곳에 가 있었다. 용산 참사 현장, FTA 저지 집회 현장, 살아온 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열사라는 딱지만 부여받은 채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그 생과 사의 현장…….
너무도 부끄러웠다. 편안히 이 시집을 들고 책상에 앉아 읽어 내려가는 나의 안일함이 먼저 간 분들의 그 뜻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애초에 그 출발점이 가장 기본적인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겠지만, 항상 고단한 삶과의 싸움에 있어 이 발전 없는 나라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해 보겠다는 극렬한 의지를 그들은 불태웠다.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열사 아무개, 그만큼 내 삶은 너무도 안일했다는 것에 죄스러움을 면치 못할 것 같다.
솔직하게 감명 깊게 읽은 시 구절을 들라면 먼저 마음이 아파온다는 말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다. 어찌 이런 것들을 두고 감명 운운할까, 늘 생과 사를 왔다가며 한 번도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과연 그들의 삶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을까?
모든 건 경제 논리였다. 그들이 그렇게 삶의 뒤안길로 스러질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이 어쩌면 인류 역사 발전에 으레 있을 법한 삶의 낙오자들의 그저 그런 사라짐 정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말이다.
결혼하겠다고 찾아뵌 첫날 노동자고 월세방에 살며 더더욱 생활을 돌이켜 반성할 마음이 없다 하자 노기 띤 음성으로 음, 돈이 있어야 하네 돈이, 하셨다 그때 정말 돈이 한푼도 없었다 - 「돈」중에서 발췌 (56쪽)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겐 자신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수단으로서의 돈이, 이 시집 속에 저마다 입을 열고 소리치는 그들에겐 최소한의 인간으로 살아갈 생명줄이었다. 그래서 그 생명줄을 위해 늙을수록 더 천대받는 노동자이기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이 현실이, 겉만 번드르르한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 나라에서 조금도 적응하지 못하는 그들의 삶이 안타깝다는 말로는 그 아픔의 깊이를 헤아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출산휴가를 주지 않기 위해 미혼은 3개월, 신혼은 6개월짜리 계약이었다. 비슷한 일을 하고도 정규직 상여금은 600%였지만, 파견직은 0%였다. 문자로 보내 온 해고 사유는 '근무 중 잡담','조퇴'였다. 2008년엔 투쟁 1000일 전에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세 번에 걸친 고공농성과 두 번에 걸친 국회의사당 내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점거, 96일에 이르는 집단 무기한 단식 등을 진행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사측은 정부와 경총의 눈치가 보여 자기들도 맘대로 정리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구로공단 내 90% 이상이고, 우리 사회 전체로는 860만여 명에 이른다. (85쪽)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우리 나라에선 가장 안정적이라 여겨지는 학교에 몸을 담고 있는 나로선, 비정규직의 비애를 이해할 여지가 사실 부족했다. 살아가노라니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의 애환과 삶의 피비린내 나는 절규와 몸부림은 때론 가지지 못한 자들, 세상에서 낙오된 자들의 그럴싸한 변명거리 정도로 여긴 것도 적지 않게 사실이라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연 이 안정성을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처한 이 위치에서의 안정성을 위협받을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나라에선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건 둘째 치고, '변함 없이 그러한 어떤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지금껏 살아오면서 너무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겠다.
90원 있는 이가 10원 가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회가 아닌, 가진 것이라곤 그게 전부인 그들의 10원마저도 빼앗아 100원을 만들려는 사회,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이 가장 인생을 혹은 이 사회를 잘 사는 방식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 시집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결국 시인이 느낀 세상의 현실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인용하며 이 시집에 대한 느낌을 맺을까 한다.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들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수조 앞에서」,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