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은 고등어를 ‘등이 푸른 자유’ 에 비유하기도 하고 소금에 절여진 채 구워져 상에 오른 고등어의 아픔을 저마다의 아픔으로 토해내기도 한다. ‘고등어’란 단지 하나의 보통 명사에 불과하지만 ‘고등어’에 내재된 각양각색의 이미지와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한 가지 사물을 보면서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감정과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마도 세상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사람마다 각자가 가진 고유의 프레임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난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아마도 열린 프레임 보다는 견고하고 각진 나만의 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인간으로 성숙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어쩌면 이런 창을 점차로 넓혀가는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프레임의 확장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요원한 일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어떤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비린내 나는 생선에 불과한 고등어에게서 ‘등이 푸른 자유’ 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늘 시인의 감수성을 부러워하면서 나의 무딘 감성을 탓해 보지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란 곰이 사람이 되는 인고와 기다림의 시간만으로는 되지 않음을 아프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예민한 시인의 시각에서 둔감하지만 나의 시각으로 돌아와 다시 고등어를 바라본다.
망망대해 짙푸른 바다를 거침없이 헤엄쳐 다니던 등이 푸른 자유는 어느 날 누군가의 밥상에 벌건 살을 드러낸 채 누워있다. 민첩한 몸놀림 속에서 빛나던 자유는 무생물의 객체로 환원하여 아무런 말이 없다. 고등어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 인지도 모른다. 정글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세상속에서 하루 하루 치열한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고등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침묵할 것이다. 빛나던 자유대신 어두운 침묵과 무생물로의 환원.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등어의 자궁속 깊은 바닷물처럼 내 마음의 상념도 얼마간 깊고 무거워진다. 그래도 고등어는 누군가의 밥상에 올라 인간의 피와 살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까?
거대한 우주공간에서, 그리고 아득한 역사속에서 인간 존재란 한낱 미물에 불과할 뿐이다. 무한대의 시공간속에서 언젠가는 사라져갈 인간 존재에 대한 자각은 자연앞에 겸허해지고 나의 삶을 돌아보고 타인의 삶에 대해서 경건함을 잃지 말라는 충고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실존주의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삶이 무의미할수록 역설적으로 현재에 더 충실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힘찬 몸짓으로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고등어처럼 매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서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그림 한 점 남기고 싶다.
망망대해 푸른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등어를 떠올리며 내 마음속 창 하나가 조금은 커진 듯한 착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