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거지"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학창시절, 엄마 역시도 어른들의 위선에 분노하곤 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또 엄마는 그런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슬프지만 말이야.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단다. 소년의 눈에 비친 위선 가득한 세상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순수성을 일깨워 주는, 그래서 윌리엄 포크너 같은 대작가는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는 극찬을 보내기도 했단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뉴욕 맨하튼에 사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4개 과목에서 낙제를 받아 사립학교에서 퇴학당하면서 시작된다. 학교를 나온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2박3일간 뉴욕을 방황한다. 홀든에게는 구원이 필요했지만 세상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만을 쫓는 위선자들일 뿐이었다. 센트럴 파크에서 "연못의 물이 얼면 오리들이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라고 묻는 따뜻하고 순수한 심성을 가진 소년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홀든은 서부로 갈 결심을 하고 마지막으로 사랑스러운 여동생 피비를 만난다. "오빠는 모든 일을 다 싫어하는 거지? 오빠가 뭘 좋아하는지 한 가지만 말해봐" 라는 피비의 질문에 홀든은 이렇게 답한다. 소설의 핵심 장면이다. "나는 늘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중략) 어른이라곤 나 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중략)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거지. 바보 같은 얘기란 걸 나도 알아.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건 그거야"
결국 홀든은 집으로 돌아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치료를 받아야 할 대상이 홀든인지, 아니면 세상인지 알 수 없지만 홀든의 방황은 그렇게 끝이 난다.
네가 이 책을 본다면 아마도 엄마와는 또 다른 감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넌 이 사회의 모순과 위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니까 홀든에게 감정이입하는게 쉬울 것 같구나. 엄마를 비롯한 기성세대에게는 잃어버린 순수성을 일깨워준다면, 아직은 어른들의 세상에 물들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는 홀든의 방황과 좌절이 현재 너희들의 가치관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던 홀든의 생각이 참으로 멋지지 않니? 실제로 샐린저는 중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으며 유명 감독이 찾아가 이 작품의 영화화를 제안했을 때도 "홀든이 싫어할까봐 두렵다"는 이유로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속물일 수 없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으며 홀든은 샐린저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이 소설이 세계인들의 통과의례로 읽히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여전히 허위로 가득차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을 통해 잃어버린 순수성을 되찾고 내 안의 위선과 허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참으로 의미 있었던 여정이었던 것 같구나. 홀든과 함께 세상의 불의와 허위에 분노하는 내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꺼져가던 엄마 마음 속 순수성의 불씨가 아직은 살아있음도 느꼈단다.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이재에 밝은 사람이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현실감각을 타고나서 체세술에 능한 것은 큰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그게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순수성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마른 가슴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삶 역시도 메마른 사막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금 밑지고 살더라도 네 가슴속 반짝이는 오아시스를 메마르게 하지는 말아라. 물론 우리 영아도 자라면서 네 안의 순수와 열정을 점점 잃어갈 수 있겠지만 마음 한 켠에 누군가를 위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자리를 꼭 남겨두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엄마는 언제나 변함없이 너를 지켜주는 영원한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걸 알고 있지?
홀든의 순수함이 너무나 간절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면서 내 안의 속물근성을 깊이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