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 제자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37년 전 초임지 제자인데 주례를 부탁하는 것이다. 그 제자 본인이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우리 반이었던 친구가 결혼한다고 전한다. 전화를 건 제자는 당시 반장을 했었는데 졸업 후에도 친구끼리 연락을 주고받는 등 소식을 주고받나 보다.
"선생님! ○○이 아시죠? 그 친구는 우리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린데 지금 47세입니다. 오는 9월 하순 결혼한다는데 선생님께서 주례를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사회는 제가 볼 것이고요."
엉, 이게 무슨 말인가? 50대 후반 스승이 40대 후반 초등학교 때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본다고? 실상은 이렇다. 아마도 그 당시 제자들 모임에서 스승을 주례로 모시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었나 보다. 그런데 이미 결혼하여 자식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니 어떤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런 부탁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필자의 교직 경력을 살펴보니 초교 재직 때 6학년 담임을 한 것은 딱 2회다. 여자중학교 재직 때는 중3 담임 1회다. 우리는 통상 주례를 모실 때 존경하는 은사 중 초교 6년 담임이니 중3, 고3 담임을 모신다. 교직 생활에서 가장 큰 보람은 담임에서 찾을 수 있다. 학생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니 정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부장교사를 하고 나면 담임과 멀어진다. 부장교사부터는 학교 일 하느라 학생들과 가까이 할 기회가 적어진다. 필자의 경우, 80년대 후반 학교신문 매월 만드느라. 90년대 초반에는 주임(부장) 교사하느라 담임을 맡지 못하였다. 당연히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제자를 기르지 못했다.
교직 생활 37년을 돌아보니 그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누구는 주례를 몇 번 보았네 하며 자랑을 하는데 얼마나 못난 스승이면 주례 한 번 부탁하는 제자가 없었을까? 스스로 부족한 교사임을 탓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감명을 주고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위대한 스승이 되어야 하는데 거기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 결혼을 하는 제자 모습을 떠올려 본다. 신촌부락에서 대지초교까지 도보 통학을 했고, 이름이 제약회사 이름과 같아서 친구들은 제약회사 이름을 불렀었다. 얼굴은 희었으며 성격은 얌전하고 발표도 조용조용했었지.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결혼식을 앞두고 배우자와 함께 인사차 들른다고 한다. 주례를 부탁받은 것은 영광인데 한편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주례사 초안 작성에 앞서 주인공들에게 사전 과제로 내어 줄 것은 무엇인지? 이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주례로서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할지? 또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모범적이었는지?
반장 제자와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 하나가 왔다. "9월 27일(토) 18:30 분당 ○○○디자인센터" 이제부터 주례라는 새로운 과업에 도전해야 한다. 남들이 하는 것은 보았어도 내가 주례석에 앉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주례라는 자리는 영광된 자리다. 신랑 신부에게 인생의 멘토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삶의 지혜도 주어야 한다.
'나도 주례를 설 수 있을까?' 잘 준비된 주례가 될 수 있다. 멋진 주례를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지금의 삶을 좀 더 진솔 되게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본이 된다는 것, 존경을 받는다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자로서 올곧은 삶을 살아온 사람은 바탕이 튼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