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많은 시대가 갈구했던 염원이었다. 신(神)도 천국보다는 그런 꿈이 이뤄지는 땅을 바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기억에 상처로 남은 대형 인명 사고를 낸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과 간첩조작 사건, 용산 참사 그리고 세월호의 침몰…. 이같은 국가적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후속 조치들이 발표되지만 그때뿐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사건은 형태를 달리하여 되풀이 된다. 왜 이같은 일이 이렇게 반복되고 있을까? 계속되는 재난은 지도자의 무능이나 국민성 때문이 아니라 생각된다. 올라갈수록 권한은 커지지만 책임은 줄어드는 관료시스템 때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책임’을 의미하는 영어 ‘responsibility’는 ‘반응하다’의 ‘response’와 ‘능력’을 의미하는 ‘ability’의 합성어이다. 결국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말은 누군가의 아픔이나 슬픔,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반응(respo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의미한다. 이런 어원적 의미에 비추어볼 때 책임을 지려면 뭔가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뭔가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촉수가 민감하게 발달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아픔이든 애타게 뭔가를 요청하든 그 목소리에 반응하려면 귀를 기울여 잘 들어봐야 한다. 잘 들어도 상대방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다. 가끔 잘못 알아듣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아무튼 상대의 말하지 못하는 내면의 아픔이나 쉽게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소리를 잘 들어봐야 한다. 그래야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알아듣지 못하고 무조건 반응할 수 없듯이 상대가 원하는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책임질 수 없다.
책임은 책임지는 행동으로 완성된다. 책임진다는 말은 책임 있게 행동한다는 말과 동격이다. 책임은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책임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동반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여기서 능력은 머리로 계산해서 무엇을 책임질 것인지를 따져보는 능력이 아니라 가슴으로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느낄 줄 아는 능력이며, 가슴으로 느낀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또는 타인의 간절한 호소나 구원의 손길에 부응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 능력을 의미한다. 실천이 실종되면 책임도 무책임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책임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 속에서 느끼는 책임의식과 함께 자란다. 책임이라는 말은 책임을 지는 주체와 책임을 짐으로써 맺어지는 관계 안에서만 의미 있는 말이다. 책임의식은 겉으로 보기에는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되지만 잘 생각해보면 나와 관계없는 일이나 현상은 없다고 생각하는 의식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한 시대이다. 그러나 어두움도 깊다.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이 너무 아득하다.
세상은 거대한 관계망의 일부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어떤 관계가 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나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 의미가 드러난다. 관계 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그래서 관계가 맺어지는 순간, 관계가 계속되는 한 책임도 같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하여 나를 뽑아주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노래한 모든 사람들은 지금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