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9일 인천공항을 떠나 13시간 비행 끝에 워싱턴에 내렸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갖고 추억을 쌓으려는 것과 작은 아들의 대학편입 관련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인터넷과 지인들을 통해 알게 된 내용과 아들 본인이 원하는 방향에 맞추어 선택한 몇 군데 학교를 중심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자동차로 여행할 계획이므로 한국에서부터 국제면허증을 준비하고 여권과 더불어 운전면허증도 가져갔다. 미국 현지에서 만날 친구들에게 줄 선물로 한국 홍삼으로 만든 홍삼, 홍삼차, 양갱, 사탕 등을 포장하여 가방에 넣었다.
객지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 그 동안 아이들이 살고 있던 기숙사나 집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기대, 보름동안 미국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한다는 들뜸으로 Up 된 마음으로 가방을 꼭꼭채웠다. 큰 아들이 부탁한 ‘기타’도 뽁뽁이라 불리우는 에어캡으로 나름 정성껏 싸서 인천공항으로 향했지만 ‘기타’처럼 손상이 우려되는 물건은 별도의 포장이 필요하여 공항내 포장센터에서 재포장하여 모두 화물로 부쳤다.
워싱턴에서 남편의 후배이신 변박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시고 5시간 운전을 하여 큰 아들이 있는 버지니아 공대까지 바래다 주셨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마중을 나오시고 긴 시간 운전을 하여 주시니 지금 생각하여도 감사할 따름이다. 필자 개인의 성향이겠지만 선배와 후배 사이의 관계가 이처럼 돈독한 적은 없었다. ‘너희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유명한 말씀이 생각났다. ‘앞으로의 삶에서는 나도 그렇게 해야지’하고 나름 단단히 결심하였다.
큰 아들이 학교내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학회에서 돌아왔다고 하였다. 항공학회가 텍사스에서 있어서 대학원생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일주일간 참석하고 돌아왔는데 텍사스에서 버지니아까지 더러 쉬면서 장장 23시간 운전하여 왔다고 하였다. 젊은 청춘들이라 가능한 일이다.
학교내 호텔에서 짐을 풀고 아들이 살고 있는 기숙사로 걸어갔다. 학교 빌딩들은 넓디넓은 잔디밭으로 이어져 있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학교내 호수에서 오리들이 모여서 잠을 자는데 사람이 옆을 지나가도 개의치 않았다. 100여년 세월을 견딘 기숙사는 외관이 훌륭하지만 층마다 화장실이 하나인 탓으로 기숙사비는 저렴하였다. 청소는 늘 잘 되어있고, 직원들이 친절하다고 아들은 아주 좋다고 하였다. 필자가 기숙사에서 유심히 본 것은 현관을 들어오자 보이는 기념판이었다. 이 기숙사는 고인이 되신 분들을 기리고 있다는 현판과 Baldwin 부부가 주는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명단을 나타내는 현판이다. 이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만 대상이 되는 것일까?
이튿날 아들의 교수님도 뵙고, 연구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여러 나라 학생들도 만났다. 학생들간에 서로 돕는 따듯함이 흐르는 분위기라 마음이 안심되었다.
아들이 자동차를 운전하여 워싱턴으로 이동하였다. 한국전 참전 용사를 기리는 추모공원, 스미소니언 박물관 중 과학관을 구경하였다. 항공공학자들인 남편과 아들이 열심히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영화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브루클린 다리 위도 걸어보았다. 브루클린 다리에서 우리 가족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느닷없이 한 여성이 합류하여 사진을 찍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재미있는 곳이다.
워싱턴에서 뉴욕까지 가는 유료 도로는 총 35불 정도의 통행세를 내야한다. 하이패스가 없는 우리 차는 골골이 기다렸다가 현금으로 통행세를 내야했으므로 조금 불편하였다.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항목이다. 뉴욕에서 남편 지인의 집에서 이틀을 보냈다. 이분은 미국에서 성공한 분으로 공주대학교 객원교수로 계시며, 공주대학교 학생들 두명을 유엔에 인턴사원으로 취업을 시켜주었고, 미국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한국을 알리는데 공이 많은 분이다.
작은 아들은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 미주리주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미술쪽으로 유명한 학교로 편입하고 싶어하여 이번 여행에서 몇몇 학교를 둘러보려 계획하였다. 뉴욕의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롱아일랜드 대학을 찾아가 보았다. 목가풍의 아담한 학교였으며 현재 방학이라 학교 분위기만 보려했는데 경비를 담당하는 분이 나오셔서 다양한 자료를 주었다. 주변을 돌아보는 여자분들이 있어 물어보니 스페인에서 온 선생님들이며 연수차 들렀다고 하였다.
로드아일랜드 학교는 미술계에서 매우 유명한 학교이다. 아들은 그 학교를 보고싶어했다. 뉴욕에서 로드아일랜드주로 가보기로 하였다. 로드아일랜드는 도시 전체가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이미지였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학교와 도시의 경계가 없어 로드아일랜드 미술대학 건물이 도시 건물 속에 섞여있었다. 로드아일랜드 미술대학과 자매대학인 브라운대학이 록펠러도서관 앞쪽에 있었는데 브라운대학은 학교 울타리가 있어 도시의 건물들과 경계를 확실히 하였다. 브라운대학은 매우 아름다웠다. 길가 주차장에 몇 불을 넣어 주차시간을 확보하고 학교 안팎을 돌아다녀보니 방학인데도 학생들이 제법 많았다. 동양계 학생들이 많이 보여 반가웠다. 학생들의 숙소사무실에 들러 뱃지도 받아오고 간단한 자료도 받았다. 로드아일랜드에에서 하루를 지내고 보스톤으로 갔다.
보스톤에서 반가운 분을 만났다. 남편 후배분인데 하버드대에서 박사를 마치시고 하버드대학 근처에서 주변의 대학과 연결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셨다. 아이들의 수업에 관련된 다양한 말씀도 듣고 퍽 유익한 정보도 많이 얻었다. 하버드대학 바로 근처에 사무실이 있는 관계로 사무실을 나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 하버드대학도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분위기이다. 1990년대 초에도 왔었기 때문에 건물과 분위기에 대한 감동은 없었지만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한 여행이라 퍽 즐거웠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도 들러보고 주변 마트에 들러 물과 과일, 김밥 등을 사서 호텔로 가져왔다. 보스톤은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어 차가 없어도 생활이 가능하다.
보스턴에서 현재 작은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로 갈 계획을 세웠다. 자동차로 13시간 거리였다. 이번 여행 중에 아들과 남편, 그리고 필자가 정확히 2시간씩 운전하고 쉬며, 순번을 세워 운전하기로 규칙을 세웠다. 워싱턴, 보스턴, 뉴욕 등 복잡한 거리는 아들이 하고, 비가 오거나 어두운 밤 운전은 남편이 담당했다. 필자가 하겠다고 해도 ‘못미더움’이라 하며 배려해 주었다.
작은 자동차 안에서 복작거리며 음악듣고, 수다떨고, 맛있는 것 사서 나누어 먹었다. 이태리 음식이 먹고 싶으면 아이들은 휴대폰으로 구글맵을 눌러 평점 좋은 음식점을 찾고, 음식점이 선택되면 바로 주소를 입력하여 길안내를 받아 찾아가서 맛나게 먹었다. 오하이오주에서는 한국음식을 먹자고 의견이 일치되었다. 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20분쯤 가면 갈비찜이 유명한 평점 5점 만점에 4.9인 한국 음식점이 있다고 구글맵이 알려주었다. 갑자기 앞이 안보일정도로 장대비가 퍼부어 내렸지만 가던 길을 멈추고 마을로 들어갔다. 오하이오의 주도가 클리블랜드이다. 클리블랜드 소속 추신수선수도 이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고 종업원이 말해주었다. 음식비 외에 팁을 넉넉히 주고. 지니고 있던 동전도 한웅큼 주었다. 한국어로 신나게 말하고 같은 정서를 가진 사람을 만난 까닭에 인심이 후해졌나보다. 주로 미국 식당에서 다양한 주문에 시달리다 낯익은 밑반찬에 단지 한마디 ‘갈비탕’ 하고 주문하였다. rare, midium, well done이 아닌 그냥 ‘갈비탕’ 한 마디.
다시 퍼부어내리는 빗속을 뚫고 나와 휴게소에서 휴발유를 넣었다. 가장 짧은 거리도 5시간 운전인 까닭으로 휴게소에 들러 휴발유넣고, 아이스크림, 과자 등 먹고, 다시 휴게소 들러 휴발유넣고 스트레칭하고를 반복하였다. 음악듣고 이야기 하고 아이들과 아주 재미있었다. ‘엄마, 이 노래 어때?’ ‘ 얘, 듣기 좋다. ’ 아버지 세대와 아이들 세대였지만 그 부모 밑에서 커서 그런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풍의 노래가 필자와 남편에게도 즐거웠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들었다. 김동율의 ‘출발’, 버스커버스커의 ‘벗꽃엔딩’, 아이유의 ‘너와 나’, Sg워너비의 ‘라라라’ 등. 보름동안 같은 노래를 반복하여 들으며 미국 11개주를 돌았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필자는 자동차 여행이 가족여행으로는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 중에 마을마을 곳곳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자동차 정비를 위하여 정비소도 들어가보고, 편의점에 들어가서 우연챦게 미국에 유학와서 공부끝나면 귀국하리라 하였던 것이 35년째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는 한국사장님도 만날 수 있었다. 끝없이 넓고 푸른 옥수수 농장도 보고, 말과 양이 뛰노는 농장도 보았다. 산이 많아 꼬불꼬불한 길이 많은 동부와 길이 넓게 쪽 곧은 중부의 차이도 알 수 있었으며, 길고 긴 여행을 해야하는 차들이 한밤중에 60마일 이하로, 트럭은 45마일 이하의 속도로 서로 배려하며 운전하는 모습도 보았다. 길에는 오랜 시간 운전으로 닳아버린 타이어가 뱀허물 벗어지듯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물과 음식이 필요하면 마을로 들어가서 한아름 사서 차에 실었다.
또한 자동차 그 작은 공간에서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번갈아 잠도 자고, 먹기도 하고, 한 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도 하고, 노래도 함께 하였다. 보름 동안 아이들은 100번을 더 넘게 들었다고 고만하라고 하였지만 아이들이 태어날 때 너무 커서 의사선생님이 ‘우아 크다’ 하고 아기를 번쩍 들어올렸다는 이야기, 자라면서 참외먹다 체하여 고생한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즐거워하였고, 머리컸다고 엄마, 아빠와 다른 시각의 의견을 마구 주장하며 운전할 시간이 되었음에도 운전석에 앉지 않고 토론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공부스트레스, 지나간 시간의 어려움 등을 듣고 마음이 아팠으며 그 고통의 시간을 잘 지낸 아이들에게 고마웠다.
올해는 남편의 회갑이며 이 여행은 남편의 회갑여행이기도 했다. 필자는 아이들이 결혼을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국내 자동차 여행을 해보리라 결심을 해본다. 필자의 회갑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국내 자동차 여행을 꿈꾸어 본다. 대충의 계획을 세워놓고 지도와 휴대폰에 의지하여 서로 의논해가며 전국을 유람해 보자고 집안 안건에 올려놓을 생각이다. 더 나아가 고희연에 건강과 여건이 허락되어 손주들도 함께 하는 가족여행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