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고독을 만난다. 그것이 생노병사의 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이 과정이 문제이다. 여러 가지 좋은 약과 의술이 발달하여 현대는 조기 발견을 하면 왠만한 질병은 거의 고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래도 역시 무서운 병은 암이다. 한 노인이 이 집에서 40년을 살았다. 군인이었던 남편과 평생을 바쳐 일군 삶의 공간이다. 구석구석 남편의 체취가 있다. 지난해 10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병원에서 “더 이상 해드릴 게 없다”고 말했을 때 할머니는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집은 마지막 안식을 주는 곳이다.
할머니의 암이 발견된 건 3년 전이다. 이미 위암 4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간에도 퍼진 데다 암 덩어리가 위와 대장 연결 부위를 막고 있어 수술도 위험했다. 그러나 살고 싶었다. “항암치료를 해보자”는 의사의 말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할머니는 암과 싸웠다. 2년간 60여 차례 독한 항암치료를 버텨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지난해 9월 마지막 항암치료가 끝난 뒤 의사는 “길어야 3개월, 짧으면 한 달입니다. 호스피스를 알아보시죠”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너무나 억울했다. 하지만 의사가 말하는 3개월은 정말 적합한 답변일까? 어떤 사람은 의사들이 이 3개월이라는 말로 환자를 잡는다고 한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 정도로 생각했다.
가족들은 입원이 가능한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봤다. 그런데 할머니는 “병원은 무섭다”며 한사코 "집에 가자"고 했다. 딸은 “암 병동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옆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치고 끙끙거리는 걸 보셨다.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삶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응급상황이 오더라도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같은 연명치료를 일절 하지 말라고 가족에게 당부했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이 올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생의 뿌리를 단단히 하여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똑같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의 떡을 먹으며 살아간다. 겉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삶의 판가름은 생의 고난 속에서 드러난다. 생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역경과 고난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생의 뿌리가 없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 순간의 고생이 그의 삶 전체를 파괴시킨다. 이때 선택하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선택은 창조자의 뜻이 아니다.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창조주만이 할 수 있다. 그 길을 묻는 것이 철학이요, 종교다. 그러나 요즘 세태는 이것을 무시하고 있다. 인문학이 허무에 빠진 인생들로 하여금 제 길을 갈 수 있도록 제 역할을 다하길 기대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