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경쟁력 강화', '국가경쟁력 강화'. 이것이 교육개혁의 목표였고 또 지금도 그러하다. 여전히 이런 구호를 앞세워 교육현장에서 겉돌 수밖에 없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개혁의 저돌성이라고나 할까. 특별히 교직사회가 가장 큰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교원의 처지가 이럴진대, 교육의 현주소를 말해서 무엇하랴.
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4년여가 지나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민정부’에서 시작된 교육개혁의 시계는 벌써 8년에 다가서 있다. 모두가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이다. 개혁을 통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은 걸까? 분명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다.
‘교육경쟁력 강화’, ‘국가경쟁력 강화’. 이것이 교육개혁의 목표였고 또 지금도 그러하다. 여전히 이런 구호를 앞세워 교육현장에서 겉돌 수밖에 없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개혁의 저돌성(猪突性)이라고나 할까. 특별히 교직사회가 가장 큰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교원의 처지가 이럴진대, 교육의 현주소를 말해서 무엇하랴.
교육개혁이 남긴 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개혁의 철학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개혁의 방법론은 또 어떠한가? 어째서 무리하게 교원정년단축정책을 추진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해 있는 걸까? 교원성과상여금제 도입은 또 어떠한가? 교육개혁을 추진한다면서 교원들의 목소리를 이토록 철저하게 외면한 때가 있었는가?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개혁을 추진하면서 정부는 교사(원)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 왜 그런 걸까? 한마디로 개혁의 방법론 때문이었다. 교육에 ‘시장조건(market conditions)’을 창출하여 ‘소비자주권(consumer rights)’을 보장하자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소비자’로서 학생(그리고 학부모), ‘공급자’로서 교사. ‘교육서비스’의 ‘공급자’로서 교사들이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교사들이 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게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그저 처분만 바라온 게 우리의 학부모들이다. 때론 교사들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싶은 마음조차 억누르며 지내왔다. 그저 자식의 장래를 위해 참고 지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마당에 소비자주권을 보장하기 위해 교육개혁을 추진한다니 ‘낭보’가 아닐 수 없다. 특별히 교사들이 변화해야 한다는 말에는 그저 감격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교사가 변화해야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교육 관련 당사자들 가운데 유독 교사만 문제란 말인가? 정녕 모든 교사가 ‘개혁의 대상’이란 말인가? 이런 물음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소비자주권이란 말은 대관절 무얼 뜻하는 걸까. 교사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들의 변화를 꾀할 일이지 왜 갑자기 학생과 학부모가 ‘교육소비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개혁의 방법론이 제시된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개혁 당시 정부는 우리의 교육현실을 면밀하게 진단하지 않았다. ‘처방전’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시장만능론)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수입’해 온 이데올로기로 교육현실을 재단(裁斷)하고, 들고 있던 처방전을 들이댄 것이다. 실로 유감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행태가 일을 크게 그르치고 말았다.[PAGE BREAK]시장만능론적 교육개혁은 ‘공교육재정 감축’을 목표로 한 정책이다. 교육에 들어가는 ‘돈’이 문제였다. ‘과도한’ 공적 부담이 재정적자를 유발하고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니 이걸 해결하지 않고서는 ‘국가경쟁력’을 말할 수 없다. 그러니 공교육에 ‘시장조건’을 창출하여 비용-편익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또 할 수만 있다면 학교를 민영화해야 한다. 교육의 사사화(私事化), 즉 ‘공교육 시장화’와 ‘학교 민영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이었다.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해 왔다고 생각하는 기업과 부유층의 요구가 반영된 해법이었던 것이다.
엉뚱하게도 이런 이데올로기를 수입해 온 것이다. 개혁을 한다면서 정작 우리의 교육현실이 어떤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의 ‘과소 투자’로 일관해 왔다는 지적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GNP 대비 5% 또는 6%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대통령 선거공약의 단골메뉴였을까.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자니. 더구나 ‘시장조건‘과 ‘교육의 질‘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이들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수 있는 교실 여건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경쟁’을 강조하기만 하면 그만인가.
교사들 ‘개혁의 대상’으로 몰리다
교사(원)를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한 이유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교육의 질 제고’는 뒷전이고, ‘공교육재정 감축’이 개혁의 목표였다. 인건비 총량을 줄이려는 유혹을 쉽게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이것이 교원의 정년을 단축하고 교사의 고용 형태를 다양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간제교사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도입되지 않았던가. 이런 정책에 대해 교사들이 반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처음부터 교사들에게 ‘재갈‘을 물릴 방도를 강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교육의 사사화’ 전략은 필연적으로 교육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시장조건에서 교육소비자는 다 같은 소비자가 아니다. ‘구매력’에 따라 서비스의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본권인 교육권을 소비자주권으로 재해석하여 교육불평등을 조장하는 정책을 지지할 교사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들은 정부가 내놓는 정책의 ‘참뜻’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또 전문직단체나 교원노조로 조직화되어 있다. 편협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정부로서는 가장 두려운 존재인 셈이다.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언론을 동원하여 교직사회에 뭇매를 가하고, 학부모를 부추겨 교사를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간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교사를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면서 강행한 교원정년단축정책이 교직사회에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다 ‘돈’ 때문이었다. 시장만능론에 사로잡힌 정부가 교직사회에 무거운 멍에를 씌운 것이다. 하루아침에 교사들이 촌지나 받아먹는 ‘파렴치범’으로 매도되었다. 그런 교사가 전혀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인건비를 줄이고 호봉 낮은 교사를 쓰기 위해 교직사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던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교육이 ‘믿음’을 기초한 일임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다시 묻건대, ‘늙은 교사’는 모두가 실력 없고 무능한 교사인가. 이런 식의 발상도 ‘돈’이 앞서지 않으면 감히 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하튼 이 정책을 강행하면서 정부는 ‘절약’된 돈으로 젊고 유능한 교사들을 더 많이 충원하여 교직에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것이 교육의 질을 높이는 지름길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진 게 있는가.
애꿎게 나이든 교사가 교단에서 내몰리고, 초등교육에 관한 한 교사부족에 쩔쩔매는 형국이 초래되었다. 과연 이것뿐일까? ‘교사이탈’은 또 어떤가? 지난 3년간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교사가 자발적으로 교단을 떠났다. 무차별적인 경제논리에 교사들의 마음이 이미 돌아섰다는 징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떠나도 ‘괜찮은 사람’은 보따리를 싸는 풍토에서 교육이 온전하기를 기대해도 좋은 걸까?[PAGE BREAK]
부족한 교사들, 연속된 미봉책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실로 궁색하기 짝이 없다. 교과전담교사를 정규교사로 발령하는가 하면, 퇴직한 교사를 기간제교사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중초임용정책을 내놓고 말았다. 다른 부처도 아닌 교육인적자원부가 교직의 전문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이런 미봉책들이 교사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직사회가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국민들로부터 받게 한 점이다. 사정이 이런 데도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교육에 들어가는 ‘돈’을 줄어야겠다는 황당한 발상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 결과 교직사회가 나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솔직하지 않은 당국의 태도가 사태를 한층 더 악화시켰다. 속내를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정당성이 없는 정책이라면, 추진하지 않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러나 교원성과상여금제를 도입하려는 데서 보듯이 여전히 겉과 속이 다른 교원정책이 매달려 있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언가?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교원성과상여금제 역시 핵심은 ‘돈’이었다. 별도의 예산을 책정했다고는 하나 결코 추가 보상이 주목적이 아니란 점만은 분명하다. 시행 첫 해이기도 하거니와 예견되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는 교사간의 치열한 경쟁 유발이며, 나아가 인건비 총량의 감축 내지 교원의 대치탄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원성과상여금제는 시장만능론적 관리전략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교사를 대상화하고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교육서비스’의 ‘공급자‘일 뿐 더 이상 ‘교육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럴진대 차등적인 물질적 보상을 통해 공급자간의 경쟁을 유발시키려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은가. ‘성과‘가 좋은 교사에게는 ‘돈’을 더 많이 주어야 한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교사에게는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같은 ‘경쟁’ 조건이 마련되면, 더 많이 차지하려고 열심히 일할 것이다. 고전적 기업관리론의 ‘부활’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교원 역시 ‘이슬’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자연 ‘돈’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많은 연구에서 성과급제의 효과가 경험적으로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게 아니더라도 교직사회를 황폐화시키는 데 앞장서온 시장만능론자들이 깨달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교육의 목적이 ‘이윤추구’가 아닌 이상, 교육의 과정(process)이나 거기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 역시 기업관리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물질적 보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사가 결코 바람직한 교육자일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교육은 과정을 중시하는 일이며, ‘돈’보다는 믿음·사랑·변화가능성 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에 기초로 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효율성‘이란 가치가 우선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렇게 되면,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투여해야 할 노동량이 많은 학생에게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된다. 그런 학생의 경우 ‘비용-편익의 효율성’이 아주 낮거나 마이너스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교육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교육서비스의 공급자로서는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 되고 만다. 오죽하면, 반 평균 성적을 높이기 위해 성적이 낮은 학생을 등교시키지 않으려는 비교육적인 일이 발생했을까. 효율성과 성과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곧 교육적 가치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PAGE BREAK]
‘교육의 공공성’ 다시 생각할 때
그렇다면 정부가 성과상여금제도를 도입하려는 이유는 무얼까? 이것은 시장만능론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교직사회는 이미 다양한 고용 형태가 도입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임금 등 고용조건을 달리하면, 그만큼 교사들간의 경쟁을 부추길 수 있다. 교직이라는 단일집단에 몸담고 있지만, 이제 다 같은 교사가 아닌 것이다. 고용계약에 관한 한, 모두가 경쟁자인 것이다. 그야말로 통제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고용과 해고를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호조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정부가 시장만능론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간의 교원정책이 교육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이익에도 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공교육 재정’ 감축이라는 경제적 동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개혁의 방법론을 보면, ‘교육’ 내지 교육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를 금방 깨닫게 된다. ‘시장조건’에서 살아남으려 버둥거리는 ‘교육서비스’의 ‘공급자’만 있고, 교육자는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경쟁과 비용-편익의 효율성을 앞세워 비교육적 행태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만능론적 교육개혁이 우리 교직사회를 뿌리째 흔들어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교사들은 의연하게 대처해왔다. 우리 교육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만능론에 대해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교육의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널리 인식시켰다. 진정한 변화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교원정년단축정책에 대해서도 맹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정부의 잘못된 정책의도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교원성과상여금제 투쟁 또한 효과적으로 전개하여 정부로 하여금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뒀다.
모두 교육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힘겨운 노력이었다. ‘개혁의 대상’이기는커녕 ‘개혁주체’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고 씨름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개별 정책에 대해서는 적절히 대응하여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게 사실이지만, 정부의 시장만능론적 정책기조를 변화시키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교사들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교육에 대한 공적 책임의식을 제고하고, 또 기꺼이 투자할 수 있게 하는 노력은 분명 교사들의 몫이다.
교육의 공공성 제고, 이를 위한 노력이 교사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잘못된 정책을 일삼아온 정부와의 대립을 발전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정부로 하여금 정도(正道)로 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 교육, 나아가 우리 사회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른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교사가 어른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라도 ‘교육서비스’의 ‘공급자’가 아니라 ‘교육자’임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