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 해 동안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수출해 번 돈이 일본 한 나라하고만 교역해 입은 손실과 맞먹는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심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국내 기업들이 일본을 뛰어넘는 원천 기술을 확보해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소재와 기계류, 생산설비를 국산 기술로 마련해야 한다. 정부도 우리가 일본에 의지하는 부품을 국산화할 수 있도록 대체산업, 부품·소재 산업 육성에 나서야 한다.
한국·일본 양국이 불편해질 때마다 우리 정치인과 미디어는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비난하고 극일을 외치며 국민의 단결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럴 때면 더욱, 우리가 경제면에서는 일본과의 거래에서 늘 실속을 잃고 있는 점이 상기되어 씁쓸해진다.
일본에 발목 잡힌 한국의 무역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하는 상품 무역에서 단 한 해도 연간 흑자를 내지 못해, 만년 적자국 신세다. ‘일본을 상대로 상품을 수출하고 받은 대금’에서 ‘일본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하고 내 준 대금’을 빼면 그 결과가 대일 상품수지(무역수지)가 된다. 대일 상품수지는 수출액보다 수입액이 항상 더 커서 해마다 적자를 보고, 매년 적자폭도 커지고 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대일 무역적자액은 145억 달러. 1980년대에는 353억 달러, 1990년대에는 1001억 달러로 대략 10년에 3배씩 규모가 늘어났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대일 무역적자는 2000년 114억 달러, 2001년 101억 달러, 2002년 145억 달러, 2003년 190억 달러, 2004년 245억 달러로 매년 연간 적자 신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해마다 적자를 크게 보면서 적자 누적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일 두 나라가 대한민국 수립 후 국교를 재개한 것이 1965년. 그때부터 2003년 말까지 38년간 누적된 대일 무역적자가 무려 2070억 달러다. 달러 당 1000원으로 환산하면 우리 돈으로 200조 원이 넘는다.
2004년만 해도 우리나라의 상품 수출은 약 2542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였다. 수입은 약 2245억 달러를 해서 무역수지가 297억5000만 달러 흑자를 냈다. 그런데 대일 적자가 245억 달러다. 한 해 동안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수출해 번 돈이 일본 한 나라하고만 교역해 입은 손실과 맞먹는다. 이쯤 되면 ‘사상 최대의 수출’을 했고 무역흑자를 냈다는 얘기가 무색해진다.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4년간 우리나라가 세계를 상대로 벌어들인 무역흑자 총액이 427억 6300만 달러다. 이 금액은 2003년과 2004년, 단 2년간의 대일 무역적자와 맞먹는다. 14년을 일해서 번 돈을 불과 2년 사이 일본에 넘겨준 셈이다.
대일 무역으로 적자를 크게 보지만 않아도 우리나라 무역수지 흑자는 훨씬 커질 것이다. 그러나 대일 적자를 워낙 크게 내다보니 전체적으로는 아무리 무역흑자를 내더라도 흑자폭이 줄어든다. 미국이나 중국, 동남아, 유럽에 수출해서 버는 돈 중 상당액을 일본에 쏟아 붓는 꼴이다.
일본과의 무역, 왜 늘 적자만 보는가 대일 무역은 왜 늘 적자만 보는가?
우리가 유독 일본에만 수출을 못해서가 아니다. 유난히 일본에서 수입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일본을 상대로 해서는 우리나라도 매년 상당한 규모로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더 크다.
왜 일본을 상대로 해서는 수출보다 수입을 더 많이 할까?
우리나라 기업들이 완제품 제조에 필요한 부품, 소재, 생산설비 등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심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공업 분야 기업들이 원료를 가공해 완제품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형태로 경제 성장을 꾀해 왔다.
공업 완제품을 만들어내려면 원재료(원자재) 외에 부품이나 생산설비(자본재) 등 중간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를 만들려면 액정화면, 반도체 칩 등이 필요하고 이들 부품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필요하다.
부품이나 생산설비의 상당 부분은 국내에 기술력이 충분하면 만들어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수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기업들이 공업 완제품 생산과 수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중간재·자본재 수입도 따라서 늘어나게 되어 있다.
기술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경제개발을 시작한 우리나라는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를 수입에 크게 의지해야 했다. 지금은 기술력 발달로 일부 중간재의 경우 국산품 자급도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수입에 의지하는 것들이 많다.
이런 경위로, 우리나라의 전체 수입 중 40∼50% 가량은 늘 중간재다. 문제는, 그렇게 수입하는 중간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일본에서 들여온다는 데 있다.
전보다 꾸준히 줄어들고는 있지만 일제 부품·소재 수입은 여전히 우리나라 전체 부품·소재 수입의 30% 가까이 된다. 일본 다음으로 미국, 유럽에서도 많이 들여오지만 수입 중간재는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절반이 일본산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의 태반을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다.
그 결과 대일 무역에서는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항상 크다. 또한 완제품 생산에는 중간재가 필수이고 중간재는 주로 일본에서 들여오므로 국내 기업들이 제품 생산과 수출을 늘리려면 언제나 그만큼 더 많은 중간재를 일본에서 들여와야 하는 구조가 생겼다. 그래서 수출이 늘어나면 대일 수입도 함께 자동으로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대일 의존형 무역구조가 굳어졌다.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는 대일의존형 무역구조 아래서는 기업들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 무역흑자를 내더라도 그 흑자의 상당 부분을 일본으로부터의 중간재 수입분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중간재인 부품·소재의 대일 무역수지는 1988년 74억 달러 적자를 기록한 이래 2001년까지 계속 연평균 100억 달러 수준의 적자를 냈다. 2001년 대일 무역적자가 약 101억 달러였으므로 연간 대일 중간재 무역적자가 대일 무역적자의 전체 규모와 비슷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경기와 대일 무역적자는 기계가 맞물려 작동하듯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내 경기가 살아나 설비투자와 생산, 수출이 늘면 곧바로 부품·소재의 대일 수입이 늘어난다. 그 결과 대일 무역적자도 함께 늘어 무역수지가 흑자를 내더라도 흑자폭을 줄인다. 거꾸로 국내 경기가 침체하면 같은 이치를 거꾸로 밟아, 대일 무역적자도 줄어든다.
지난 1997년 대일 무역적자는 131억 달러였는데 이것이 1998년에는 46억 300만 달러로 크게 줄었다. 1997년 말 찾아온 경제위기로 국내 기업들이 일시 생산을 크게 줄이면서 대일 부품·자본재 수입을 40% 이상 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넘긴 뒤 수출이 활발해지자 대일 무역적자는 다시 1999년 82억 8000만 달러, 2000년 113억 6192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
2001년에도 대일 무역적자는 101억 2760만 달러로 전년보다 다소 줄었다. 이 해에도 국내 경기가 침체해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줄이면서 대일 부품, 소재 수입을 줄였기 때문이다.
불균형 무역·산업구조의 고착 무역구조는 산업구조를 반영한다. 중간재 수입을 일본에 의지하는 양상으로 무역의 불균형 구조가 굳어지면서 우리나라에는 산업도 일본 산업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불균형 구조가 함께 고착됐다.
무역과 산업의 극심한 대일 의존은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매년 총수입의 1/5 정도를 일본에 의존하고, 농수산물 등을 뺀 중간재나 최종 완성재의 절반은 일제 수입품으로 충당한다. 우리의 주력 수출업종인 전기·전자·반도체 같은 IT 분야, 그리고 산업기계·철강·금속 분야도 일제 수입 중간재를 특히 많이 쓴다.
우리나라의 대표 수출 상품인 휴대전화만 해도 그렇다.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국산 부품은 전체의 40% 정도에 불과하다. 반도체와 LCD 같은 핵심 부품은 30%를 일제로 수입한다. 이렇게 만든 휴대전화를 수출해 100달러를 벌면 그 중 30달러는 일본 차지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2003년 반도체의 대일 수출은 약 188억 달러, 반도체 부품의 대일 수입은 207억 달러로 20억 달러 적자다. 대일 무역적자 185억 달러 중 20억 달러가 반도체 부문 적자다. 수입 반도체 부품 중 상당수는 TV나 휴대전화, 기타 정보기기에 탑재되어 다시 수출 길에 오르지만 수출입 통계만 놓고 보면 반도체가 대일 무역적자에서는 큰 요인이 되어 있다.
실제로 최근 대일 무역적자의 70∼80% 가량은 반도체 등 IT 분야를 중심으로 한 부품·소재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수출하는 상품의 70% 정도는 철강·반도체·전기전자·제품·기계류 등 중화학공업 제품이다. 그러나 주력 수출품목인 전자·철강·화학제품 제조 분야에서 대일 수입의존도가 모두 30%를 넘는다.
일본은 주요 수출품이 승용차·반도체·컴퓨터·산업용 로봇·전자복사기 등 기술 수준과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모여 있다. 반면 우리나라 수출품은 반도체를 제하고는 기술과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선박·직물·철강 등에 모여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수출이 늘면 대일 수입도 그만큼 거의 자동으로 늘어난다. 수출을 많이 할수록 대일 무역적자도 커진다. 일본이 부품 수출을 중단하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우리 수출기업은 생산을 멈춰야 한다. 우리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가 수출인데, 우리의 수출은 일본 땅에 굵은 끈으로 묶여 있다.
대일 의존에서 벗어날 길은 우리나라의 무역이 일본의 손에 묶인 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기업들이 중간재·자본재 수입처를 다른 나라로 돌리면 되지만 이 일은 개별 기업들이 당장 해내기 쉽지 않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려면 중간재도 좋아야 하는데 일제가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수입 거래를 했던 까닭에 일제품에 의존하는 구조가 굳어지기도 했다.
워낙 대일 의존구조가 굳어지다 보니 요즘엔 황당하게도 ‘대일의존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 질 좋은 일제 중간재 덕에 우리 수출이 잘 되는 걸 일본에 감사하고 일제품을 더 가져다 쓸 일(?)’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그러나 대일무역 불균형은 한·일간 기술력 차이가 주된 원인이므로 우리가 기술력을 키우면 해결될 수 있다. 일본은 대부분의 부품·소재를 자국에서 생산하는 이른바 풀 세트(full-set)형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다. 부품·소재 생산 기술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니 일본은 기술력이 좋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완성품 위주 수출 전략을 채택해 부품·소재의 수입 비중이 높다 보니 부품·소재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 우리나라 부품·소재 기업의 설계 기술, 신제품 개발 능력, 신기술 응용 능력은 선진국의 70% 수준에도 못 미치고 생산기술 수준도 선진국의 80% 미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핵심 부품·소재를 주로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선진 기업들과 구별되는 제품을 개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가가치도 크게 낮다. 그 결과 9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수출이 크게 늘어나기는 했으나 수출단가는 일본에 비해 크게 떨어진 채 물량을 늘리는 양 위주 수출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에는 전자부품용 소재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나 소재 관련 전문 연구소가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50인 이하 영세기업의 비중이 기계, 자동차, 전자 등을 중심으로 전체의 89.5%를 차지한다. 외국에서는 부품·소재 시장에서 대기업의 지배력이 높아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어서 기술 수준 개선이 요원하다.
기업 수나 종사 인구로 보면 국내 부품·소재 산업은 비중이 작지 않다. 2002년 4월 현재 약 9만 8000개의 제조업체 중 전기·전자·기계 분야를 위주로 3만 6000여 개 업체에서 약 123만 명이 일하고 있다. 사업체 수로는 전체의 36.7%, 종사자 수로는 전체의 46.4%로, 제조업 총생산액의 절반(48.2%)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기술 수준이 낮기 때문에 부가가치를 높이지 못하고 기술의 해외 의존을 계속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기술의존에서 벗어나려면 국내 기업들이 연구개발 투자를 많이 해서 자체 기술력을 키우고 일본을 뛰어넘는 원천 기술을 확보해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소재와 기계류, 생산설비를 국산 기술로 마련해야 한다. 정부도 우리가 일본에 의지하는 부품을 국산화할 수 있도록 대체산업, 부품·소재 산업 육성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