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서는 서울의 다리를 찾아 옛 궁궐도 찾아보고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인 청계천도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옛날 서울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도성이 둘러쳐 있고 명당자리에는 궁궐이 먼저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도성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은 서울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애환이 담긴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지금 청계천 주변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청계천의 옛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종로는 도성의 중앙에 자리한 보신각종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일대는 사람들이 홍수를 이루어 운종가(雲從街)라고 불리었습니다. 마장동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말을 팔고 사던 목마장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다동은 다방골로 불렸는데 주로 광교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민중들의 주거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중인들은 장통교 및 수표교 일대에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관수동은 관수교에서 유래하는데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장교동은 장통교에서, 수표동은 수표교에서, 무교동은 모전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청계천 일대에는 이렇듯 다리와 관련한 지명이 많습니다.
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래 서울 사람들의 생명수로, 배설구로, 위정자들의 정치적 무
대로 활약했던 청계천이 어느 때부터인가 빈곤과 비위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복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오는 10월 1일이면 약 6킬로미터에 이르는 청계천이 다시 태어납니다. 청계천의 역사는 곧 서울의 역사였고, 서울의 현재이고, 서울의 미래입니다.
청계천의 다리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입니다. 이 말에는 자연 그대로의 하천을 파서 새롭게 물길을 정비했다는 개척정신이 숨어있습니다. 현재 서울시장이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복원사업 또한 또 다른 개척의 역사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청계천이란 말은 1910년대 이후 붙여진 왜색 짙은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복원을 진행하면서도 지금까지 약 90년 동안 공식적인 하천명칭이었고, 어의가 나쁘지 않고, 혼란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청계천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량포가 일제에 의해 중랑천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는 백악·인왕·목멱산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도성 가운데를 가로 지나서 세 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개천에 있던 다리로 송기교, 장통교, 태평교, 혜정교, 대광통교, 통운교, 연지동교, 동교, 광제교, 하량교, 영풍교, 송첨교, 영도교, 제반교, 청파신교, 경고교, 홍제교 등이 보입니다. 그중에서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관수교, 오간수교, 영도교 등은 옛 이름을 되찾고 새로운 다리로 탄생합니다. 이에 반해 삼일교, 배오개다리, 새벽다리, 나래교, 버들다리, 맑은내다리 등은 새로 만들어낸 이름입니다. 청계천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광통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를 합한 ‘서울 청계천유적’은 지난 3월 25일자로 사적 제46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토목기술 수준을 알 수 있고 아울러 도시기능의 확대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를 밟아주면 그해 재앙을 받지 않고 각기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답교놀이가 성행하였습니다. 청계천에서 광통교(廣通橋), 즉 광교(廣橋)는 정월대보름에 답교놀이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대보름이면 동네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청계천의 다리를 밟고 연날리기를 하였는데, 젊은 남녀가 깊은 밤까지 나돌아 다님으로써 풍기문란을 이유로 금지하기에 이른 적도 있답니다. 이 다리에 쓰인 돌들은 태조의 계비 강 씨의 능을 옮기면서 당초 묘에 썼던 것들이라 합니다.
광통교는 ‘광통방에 있던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인데 성종임금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루는 성종 임금이 달 밝은 밤에 평복 차림으로 광교를 찾았습니다. 마침 다리 밑에는 경상도 흥해 땅에서 올라온 사내가 보퉁이를 짊어진 채 다리 밑에서 하루 묵으려던 참이었지요. 신분을 속인 임금이 자초지종을 들어본즉, 그 사내는 임금이 어질다 하여 죽기 전 꼭 알현하고자 어렵게 서울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사내의 고장에서 생산되는 해삼과 전복도 정성들여 준비했지요. 내가 요순임금이라도 된단 말인가, 성종은 자신을 이첨지라고 소개하고는 이틀을 기다리면 임금을 알현하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임금님을 만나려면 벼슬자리가 있어야 하는 법, 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성종은 그에게 충의초사라는 벼슬을 하사합니다. 얼떨결에 벼슬도 받게 된 이 사내가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려 궁에 들어가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첨지가 바로 그토록 뵙고자 하던 임금님이 아니었겠습니까. 임금을 만나기 위해서 며칠을 걸어 찾아왔던 순박한 시골 사내는 광교의 인연으로 금의환향하였답니다.
청계천 일대에는 큰 시장이 여럿 있습니다. 방산종합시장, 광장시장, 평화시장, 신평화시장, 세운상가, 동대문 시장 등. 그중 평화시장은 1970년 11월 23일,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면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항변했던 전태일의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는 나래교에서 오간수교에 이르는 거리를 전태일거리로, 버들교를 전태일교로 바꿔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향 잃고 이산가족으로
수표교(水標橋)는 세종 때 놓인 다리입니다. 치수를 위해 수중지석표(水中之石標), 즉 수표를 설치하였는데 그래서 수표교입니다. 지금 수표는 세종대왕기념관 마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로 철거되어 현재 장충공원에 옮겨 놓았습니다. 영조 때는 수표교 북쪽 냇가에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두어 토사를 걷어 둑을 쌓게 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이 때 쌓아놓은 모래가 긴 뱀처럼 쌓여 있어서 현재 장사동(長沙洞)이 유래하였으며, 쌓아놓은 모래가 산을 이루었는데 그곳에 꽃을 심으니 향기로운 산이 되었다는 데서 방산동(芳山洞)이 유래하였습니다. 지금도 가운데 교각 한 곳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 새겨두어 준천사업을 하는 기준점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장희빈의 집이 수표교 인근이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수표교 건너에 왕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이 있었답니다. 하루는 숙종이 영희전을 가러 수표교를 건널 때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그 바람 때문에 떨어진 발을 창가에 걸어놓던 장희빈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만남이 수표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서울시에 문의해 보니 수표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원위치로 복원할 계획이랍니다. 다리를 관찰해 보면 멍엣돌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것이 방형의 다른 석교와 차별화 되고 특히, 교각을 이루는 위아래 두 돌기둥이 물살을 향해 마름모 모양으로 틀어져 있어 물살의 저항을 막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름드리 성장한 나무를 싹둑 잘라 만든 것처럼 자연스런 조형미가 돋보입니다. 민간의 다리이지만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난간이 있어서 한껏 품위 있어 보이네요.
이 수표교는 청계천 복개시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건된 다리로 홍수를 대비한 수표를 두고 준설을 위한 지표까지, 게다가 빼어난 외모까지 더했으니 청계천의 대표교량이라 해도 무난할 것입니다. 비록 제 살던 고향을 잃고 타지에 옮겨지고, 수표마저도 딴 곳에 시집보내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금천(禁川)너머 임금님이
이제 우리 궁궐 속 다리를 찾아갑니다. 경복궁 근정전 가기 전에 영제교를 건너야 합니다. 다른 궁궐의 다리와 달리 다리 양 옆으로 돌짐승이 두 마리씩 떡 버티고 물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독특합니다. 해태일까, 사자일까, 다른 짐승일까. 사람들은 그냥 서수(瑞獸)라 일컫습니다. 혀를 날름거리고 입맛을 다시는 놈도 있습니다. 사악한 것은 아예 침범을 마라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제법 진지합니다. 엄지기둥 네 곳에는 주작으로 보이는 동물이 조각되어 있지요.
경복궁 경회루는 그 규모면에서나 역할 면에서나 경복궁의 자랑입니다. 이름도 끝내 줍니다. ‘경회(慶會)’라, 덕있는 임금과 충정심 많은 신하들이 함께 국정을 논하고자 하니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무절제한 절대 권력에 의해 기쁨의 정도가 왜곡되어 ‘흥청망청’이란 말이 유래되기까지 한 곳입니다. 이 경회루는 바깥쪽에 사각 돌기둥이 서고 안쪽에 둥근 기둥이 서 있습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말해 주고 있지요. 작은 우주인 이 인공섬에 닿으려면 동쪽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금천 건너 임금님 나라에 들어왔어도 다시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곳, 경회루의 몸값이 여기 있습니다.
경복궁 뒤편에 자리한 향원정도 방형 연못에 둥근 섬을 두어 그 위에 만든 정자입니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취향교라는 나무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취향교(醉香橋), 향기에 취해 다리를 건너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환상적인 궁궐생활일까 마는 실은 아픈 역사가 배인 곳이랍니다. 원래 취향교는 향원정과 건청궁을 잇는, 그래서 북쪽으로 난 다리였습니다. 하지만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고 다리는 전쟁 와중에 사라져 버립니다. 건청궁이라는 원래 주인을 잃고 관광객을 새 주인으로 맞아 새롭게 남쪽으로 지은 것입니다. 아름답기만 한 취향교와 향원정에는 이렇듯 우리를 몸서리치게 하는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창덕궁에는 금천교(禁川橋 혹은 錦川橋)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궁궐내 다리를 통틀어 금천교라 이르는데 하늘같은 임금님이 계시는 성역임을 말해 줍니다. 창덕궁 금천교는 남북 양쪽에 귀면을 새겨두고 남쪽에는 귀면상 아래에 해태를 닮은 석상을 두고 북쪽에는 현무로 추정되는 석상을 두었습니다. 멍엣돌마다 공하(蚣蝦)로 보이는 용을 돌출시켜 놓았습니다. 공하는 범공(帆蚣)이라고도 하는데 용의 아홉 아들 중 물을 좋아하여 다리 기둥에 세우는 녀석을 말합니다. 흔히, 이무기돌[龍頭石]이라고 하지요. 한편, 창경궁에 있는 금천교인 옥천교(玉川橋)는 그 형태와 구조는 창덕궁의 것과 흡사하지만 창덕궁의 거북상과 해태상과 달리 금천을 바라보며 수호하는 동물상은 없고 받침돌만 남아 있습니다.
경복궁 근처 서울지방경찰청 옆에는 종침교(琮琛橋) 표지석이 있습니다. ‘종침교-조선 성종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과 허침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터’라고 안내되어 있습니다. 성종 때 유명한 재상 허종(許琮)과 그의 아우 허침(許琛)이 연산군의 생모 윤 씨를 폐출할 어전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종침교에 이르러 다리 밑으로 일부러 굴러 떨어져 회의에 불참하게 됩니다. 성종이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이날 회의에 참여한 대신들을 가려 참화를 맞게 하는데 이른바 갑자사화입니다. 고의적으로 회의에 불참한 두 형제는 무사하였지요. 그들의 이름을 따서 종침교라 한 것입니다.
물은 흘러 살곶이로
살곶이다리는 한양대학교 인근에 있습니다. 세종 2년(1420)에 가교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습니다. 현재 일부만 옛 모습이 남아있네요. 살곶이다리를 전관교(箭串橋)라고 합니다. 전관교란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위치하여 ‘물살이 세다’는 물살의 ‘살’과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을 이르는 ‘곶’이 합쳐진 곳에 위치한 다리를 말합니다. 이 다리를 제반교(濟盤橋)라고도 함은 어느 스님이 이 다리를 놓고 난 후 그 탄탄함이 반석과 같다하여 유래합니다. 남아있는 멍엣돌을 보면 홈이 파져 있어 귀틀석이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렇게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이라는 의미의 살곶이[箭串坪]는 선조 때 무사들이 매를 사냥하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으로 태조 때는 응방(鷹坊)이라 하여 매 사냥을 위한 기관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응봉산이나 매봉산의 지명이 이곳이 옛날 매사냥 터였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에서는 ‘국도의 동쪽 들로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고 주위는 둑으로 둘렀는데, 나라 말을 기르며 넓이가 34리이다. 처음에는 나무우리를 만들고 해마다 개수하니 백성은 이속들의 농간질에 피폐하고, 말도 도둑맞아 도망갔는데, 명종조에 와서 상진이란 자가 정부에 건의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철색으로 열고 닫게 하니, 그 후로 폐단이 제거되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 다리는 난간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난간은 격식을 갖춘 다리에만 세웠는데 살곶이다리는 민간의 다리였기에 난간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표다리가 난간을 둘렀던 것과 대비되는군요.
현대식 다리를 달리는 지하철 소리에, 자동차 소음 소리에 지칠 만한데 오늘도 서울사람들에게 넉넉한 인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어떻게 평가받을까
며칠 후면 아이들이 성취도평가를 치른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교사의 몫입니다만, 교사평가제가 도입되면 아이들이 교사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사평가제, 누가 누구를 평가하겠단 말입니까.
청계천 복원사업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쏟아질 것입니다. 정답이 없는 평가가 되겠지만 점차 순기능이 더 많이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돌아오고 다리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은 매우 흡족합니다. 이왕이면 이름까지도 ‘개천’이나, ‘맑은 내’ 라고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