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장안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던 영화 가운데, ‘장군의 아들’이란 작품이 있었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었던 ‘김두한’의 풍운아적인 젊음과 의협의 이야기를 얼마간은 허구적 픽션을 가미하여 만든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었던 억압과 울분을 배경으로, 종로 일대 일본 경찰의 끄나풀 패거리들을 김두한의 주먹이 통쾌하게 짓누르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했다.
범상한 사람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주먹의 힘과, 불의를 용서하지 못하는 의협심,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을 인간적으로 감동시키는 특유의 카리스마 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장군의 아들에 매료된다. 게다가 사랑 앞에서는 한없는 순정의 화신이 되는 멜로의 요소까지 흠뻑 곁들였으니 이런 캐릭터가 대중의 우상이 아니 될 수 없다. 사람들은 과연 장군의 아들답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김두한은 해방 이후에도 ‘장군의 아들’로서 대중적 프리미엄을 누렸고, 이러한 인기를 정치적으로 반영하여, 그는 한때 국회의원의 자리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이 세상에는 실제로 많은 장군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군인은 계급장에 별을 달면 장군으로 칭함을 받는다. 준장에서 대장에 이르는 계급이 모두 장군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현직 장군만도 수백 명에 이르고, 장군 경력을 가졌던 사람까지 치면 이 세상에는 실제로 많은 장군이 있다. 그리고 그 장군의 집마다 ‘장군의 아들’이 있을 것이다.
장군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장군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어떤 정체성을 형성해 가며 살아갈까. 영화 ‘장군의 아들’처럼, 빼앗긴 시대와 민족을 되찾기 위해 어떤 반역의 무리와도 싸움을 수행해야 할 것 같은 의식을 가질까. 은연중에 장군인 아버지가 가졌던 명예와 훌륭한 리더십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내면의 심리를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장군의 아들들에게도, 그 장군 아버지로 인한 고충이 있을 수도 있다. 아버지만한 장군감이 되지 못하여 열등의식에 노출될 수도 있고, 장군 가문의 체통을 살려야 한다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을 수도 있다. 장군의 아들들이 평범한 병사로 군대에 가서 지내기가 만만치 않은 것은 그런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다.
이번엔 ‘광부의 아들’들을 이야기해 보자. 1980년대 초 강원도 사북 탄광촌 아이들을 따뜻한 정성으로 가르쳤던 고 임길택 선생의 이야기가 근자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마도 KBS가 매우 공들여 제작한 2007년 어린이날 특집 프로그램, ‘길택씨의 아이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코끝이 찡한 감동을 몇 번이고 느꼈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그가 직접 써서 등사지로 밀어서 만든 그 시절의 학급문집들의 외양은 지극히 조촐하다. 그러나 그 사연들을 하나하나 길어 올리면, 목이 메고 마음을 울리는 대목들이 많다. ‘길택씨의 아이들’ 프로그램 기획 PD는 27년 전, 그 때 그 학급문집에 글을 썼던 임길택 선생의 아이들을, 지금은 모두 마흔이 다 된 그 아이들을 하나하나 모두 다시 찾아가면서, 그때 그 시절 광부의 아이들로서 살았던 삶과 꿈을 지금의 자리에서 의미화 하도록 만든다. 아무튼 나는 ‘길택씨의 아이들’을 보면서 광부 아버지들과 그 광부의 아들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이들의 글에서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적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길택씨의 아이들’에 나오는 아이들은 대체로 ‘광부의 아들’들이다. 광부의 아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동어반복으로 강조하자면, 그들은 광부이다. 인생의 막장이라 할 수 있는 석탄 광산의 막장까지 오게 된,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광부이다. 아이들의 글에서 등장하는 광부 아버지들은 고단한 육체노동으로 몸이 늘 아프거나, 술에 취해 있거나, 화투장을 들고 노름을 하거나, 긴 한숨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엄마와 심하게 싸움을 하는 그런 아버지들이다. 아니 또 있다. 술만 먹으면 하는 말, 이 아비처럼 되지 말라는 체념조의 당부를 하는 아버지.
광부의 아이들은 무수히 자기 다짐을 하며 자랄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 같은 광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회적 정체를 존중할 수 없는 아이들이 마음에 가지는 응어리는 ‘아버지 넘어서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인자가 된다. 그 응어리가 곧 아이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단이 되는 것이다. 장년이 다 되어 그 시절을 술회하는, 그 옛날 ‘길택씨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의 현실, 아버지의 삶을 넘어서기를 추구하면서 살아 왔음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절망의 끝자리에서 희망이 싹을 피우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버지의 절망을 매우 솔직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 절망의 자리에서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새로운 가능성은 물론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길택씨의 아이들’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삶을 증언하는, 불혹에 가까운 광부의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아버지를 사랑으로 승인한다. 아버지를 극복하여 마침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아이들이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출세를 했건, 그렇지 못하건 이들은 모두 자신이 ‘광부의 아들’임을 의미 있게 승인한다. 그것이 증거이다.
어린 아들들에게 비쳐진 아버지 광부들의 모습은 조금도 숨김이 없다. 아니 숨김을 아들에게 연출해 보일 최소한의 돈도 시간도 공간도 없었으리라.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바깥으로 연출해 보이는 아버지와, 안에서 꾸밈없는 실체로 가지고 있는 아버지 사이에 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즉, 가면으로서의 자아[페르소나 persona]와 자신의 인격적 실체 사이에 달리 틈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여주는 아버지가 더없이 솔직하기는 하나, 자랑스러울 것이 없는, 아니 오히려 보여주기 싫은 것까지도 속절없이 보여 주어야 하는 이 당혹함의 현실을 잔뜩 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심한 곤궁과 심리적 열등과 사회적 약자의 위상에서 광부 아버지는 노상 울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들에게 사회적 문화적 자아가 고상하게 형성되지는 못한다. 아들들 또한 출세한 아버지의 아름답고 멋있는 허세들을 한번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자아를 연출하는 데 솔직하였다는 것은, 달리 보여 줄 것이 없었다는 말과 다름없으니 서글프기는 매양 한 가지이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고, 더 이상 보여 줄 것이 없는 아버지라는 것까지도 철 이른 나이에 볼 수 있었던 광부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아버지에 대해서 어찌 달리 접근할 방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선생의 아들’은 ‘장군의 아들’에 기울지도 않고, ‘광부의 아들’에는 더욱 기울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 두 아들 유형의 틈바구니에서 뚜렷한 자기 모델을 구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오늘날 선생의 아들들에게는 선생인 아버지의 긍정적 정체성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퍼스내리티를 의미 있게 강화하는 데에 아버지의 선생 역할이 크게 도움이 되지를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광부의 아들처럼 아버지의 정체성을 핍진한 현실 속에서 아프게 경험하며, 아버지의 실존적 정체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것 같다.
전통사회의 잔영이 남아 있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선생의 아들은 그 역할을 하느라고 고생을 한 셈이다. 작은 실수라도 선생의 아들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증폭되어 돌아왔고, 아들 스스로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자식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자기 견제의 끈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라고 일일이 아비가 일러주지 않아도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자세를 취하면서 생활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이었다 할 수 있다. 선생을 인식하는 문화의 힘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는 선생의 익명성을 주변이 허용해 주지 않으려던 때이었다. 이런 부담은 ‘선생의 아들’이 아닌 ‘아비 된 선생’도 마찬가지이었다. 아들이 잘못하면 자기 자식 하나 제대로 못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학교 선생이냐는 힐문이 금방 따른다. 도덕적 연좌의 묶임에서 ‘선생의 아들’과 ‘아비 된 선생’은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이다. 이제 익명성이 넘실거리는 자유로운 개성과 열린 소통의 시대에는 이런 부담이 사라졌는가. 내가 선생으로 살아도 대중사회의 흐름에 묻히면 내가 선생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교조적 규범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를 안으로 규제하는 규찰의 내적 코드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영락없는 선생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세상이 바뀌었어도 선생의 본질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무리 곤궁하고 열등해도 인생 막장에 다다른 사람처럼 자아를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다. 장군 같은 기개와 이상으로 자아를 추스르며, 가르치는 제단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들들이 그것을 위선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별히 아들에 대해서는 바깥에서 선생으로 비쳐지는 것이나, 안에서 아비로 보여지는 것 사이에 되도록이면 인식의 틈새가 없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된다면 선생으로서 행복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나는 선생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 또한 선생의 아들이셨다. 나는 평생 시골 학교 선생이었던 아버지의 진솔한 실체를 가난 속에서 많이 보았고, 지역사회에 비추어지는 아버지의 공동체적 역할, 즉 아버지의 ‘명분적인 자아’도 보았다. 별다른 인식의 괴리가 없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려서는 늘 아버지의 편이 되어서 세상을 바라보았고, 내가 선생의 길로 들어서면서는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만한 선생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시대 선생의 길과 지금 시대 선생의 길은 달라지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아들은 선생인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그는 자신이 ‘선생의 아들’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