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꿈꾸는 일을 멈추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 적응하기 급급해 꿈을 포기하거나 잠시 유보한 이들에게도 공상의 나래를 펼치며 설레어 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동심을 다룬 영화가 꾸밈없는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음직한 상상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보임으로써 순수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귀여운 상상력, 재기 발랄한 입담이 가득한 성장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도 그런 즐거움을 선사한다.
소년들의 좌충우돌 영화 제작기

첫 장편 데뷔작으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이하 <은하수>)라는 길고도 독특한 제목의 SF 코미디 영화를 선보였던 감독 가스 제닝스. 산뜻한 풍자와 기발한 유머, 판타스틱한 상상력이 돋보였던 이 영화는 흥행엔 실패했지만 판타지의 불모지인 한국 땅에 열렬한 컬트 팬들을 탄생시켰다. 이후 4년 만에 귀엽고 재기 발랄한 두 번째 장편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을 들고 그가 돌아왔다. <은하수>의 강렬한 인상을 고이 간직한 채 가스 제닝스의 차기작을 눈 빠지게 기다렸던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여전한 모습이다.
1980년대 영국의 한 시골 마을.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윌 프라우트푸트(빌 밀러)는 혼자서 노트에 그림을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취미인 얌전한 아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수업시간 도중 복도에서 자습을 하다가 벌을 서고 있던 리 카터(윌 폴터)를 만나게 된다. 학교 최고의 악동으로 수업 시간마다 쫓겨나기 일쑤인 리는 TV 프로그램 ‘나도 영화감독’ 코너에 나가는 게 소원인 시네마 키드다.
카메라를 갖고 있던 리는 윌에게 함께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윌의 그림 소재였던 ‘람보의 아들’ 영화화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기획과 촬영, 미술, 소품은 물론 출연까지 둘이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들은 마냥 즐겁다. 한 명은 사고뭉치, 또 다른 한 명은 너무 내성적이라 친구가 없는 두 소년, 극과 극의 캐릭터인 이들은 영화에 대한 애정과 상상력을 공유하면서 이내 친구가 된다.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어린 시절 액션 영화 <람보>해적판을 본 뒤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던 감독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영화의 원제도 윌과 리가 찍는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인 <람보의 아들>에서 따 온
다. 가스 제닝스 감독은 절벽 사이를 뛰어서 건너고, 웬만한 상처에는 눈 깜짝하지 않으며, 홀로 엄청난 적을 상대하는 무적 캐릭터 ‘람보’를 통해 사춘기의 불안과 혼란을 이겨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영화에는 이런 감독의 추억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 생의 주인공으로 빛나는 순간
번듯한 집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리에게는 자식을 방치하고 여행만 다니는 부모와, 아무리 존경과 애정을 표해도 자신에게 냉랭하기만 형이 있다. 한편 완고한 근본주의적 종파를 믿는 가정에서 자란 윌은 음악감상조차 금기시하는 종교단체의 감시 아래 영화는커녕 교육용 다큐멘터리조차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조차 금지된 윌에겐 헛간에서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는 게 유일한 낙이다.
그렇게 단조로움과 억압으로 가득 차 있던 두 소년은 그들만의 영화를 만들면서 학교와 집을 쳇바퀴처럼 오가는 지루한 일상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특히, 윌이 리의 집에서 생애 최초의 영화인 <람보>를 훔쳐본 순간은 천지개벽에 비견될 만하다.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총천연색 영화의 세계에 빠지면서 새로운 즐거움에 눈뜬 윌은 스스로를 ‘람보의 아들’(Son of Rambow)이라 부르면서 조금씩 변화해간다.
잔머리의 대가인 리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윌을 종종 골탕먹이지만, 피의 맹세로 의형제까지 맺으며 의기투합한 두 소년은 리의 감독 데뷔작 만들기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나 숨겨진 재능의 발견 등 흔히 연상되는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이라는 한글 번역 제목에서 느껴지듯, 아이들의 시선으로 소박한 판타지와 약간의 허풍이 섞인 영화와의 첫 만남을 추억한다. 성장기의 소년이 처음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했을 때의 그 우쭐한 기분,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창조해 냈을 때의 뿌듯함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런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리와 윌이 속한 시골 사회라는 여건은 그들에게 어떠한 도구도 배경도 제공해주지 않고 도리어 방해만 될 뿐이다. 이들이 가진 것은 달랑 리의 카메라 한 대(그나마 실제론 형의 소유이지만)와 윌의 그림 노트뿐이다. 하지만 영화제작의 어려움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수하고 무모한 용기는 소년들의 가장 큰 재산이다. 그림 속에서만 머물러 있던 윌의 상상(하늘을 나는 개와 람보를 납치한 허수아비 등)이 현실화되는 순간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것은, 남들에겐 장난처럼 보이는 것들이 이들에겐 너무나 진지한 작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에는 영화에 출연하는 게 엄청나게 폼 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아이들이 등장한다. 바로 프랑스에서 온 교환학생 디디에와 그를 추종하는 남자아이들이 그들이다. 영화배우가 꿈인 디디에는 잘생긴 얼굴과 튀는 매력으로 영국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인이 되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람보의 아들’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이들의 에피소드는 엉뚱한 재미를 더하면서 윌과 리의 화끈한(?) 액션영화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영화라는 꿈과 함께 성장하는 아이들
그렇게 영화의 두 주인공 윌과 리는 끊임없이 사건, 사고를 일으키면서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 간다. 처음엔 장난처럼, 놀이처럼 여겨지던 영화 만들기는 점차 꼭 이루어야 할 목표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년들은 한 뼘씩 성장한다. 학교에서는 존재감 없고 엉뚱한, 사고뭉치로 취급받았던 이들은 그들의 영화 속에서는 당당한 주인공이다.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며 자신들의 작은 꿈에 옷을 입혀 나간다.
두 소년이 좌충우돌 만들어낸 영화는 그들의 삶 속으로 잔잔하게 스며들어 유년의 혼돈과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아버지를 잃은 윌에게 ‘람보’라는 인물은 아버지를 상징한다. 공상의 세계 속에서 윌의 아버지는 죽은 게 아니라 악당에게 잡혀갔을 뿐이고 그래서 람보의 아들인 윌이 람보를 구해낼 때, 아버지는 그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게 된다. 몸이 성치 못한 노모를 수발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도 컸던 윌의 어머니도 처음엔 윌을 계도하는 데 급급하지만 결국은 엄격한 종교 집단의 간섭으로부터 윌을 지켜내면서 아들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재혼한 어머니 아래서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리에겐 하나뿐인 형이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형은 리를 어린 애 취급하며 무시한다. 그런데 리의 땀과 눈물이 담긴 영화 <람보의 아들>이 무심했던 형의 마음을 여는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낸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촬영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친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마지막 장면, 관객들의 웃음과 박수에 눈물을 글썽이는 리의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때 묻지 않은 소년들의 순수한 꿈은 그렇게 어른들의 메마른 가슴을 적시며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감독이 직접 발굴해 낸 주인공 소년들의 연기가 발군이다. 연기 경력이 전혀 없었던 이들은 놀라울 만큼 사랑스럽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선보인다.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조용하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성장드라마이자 모든 시네마 키드들에게 바치는 애정 어린 헌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