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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땅에서 오롯이 자라나는 아이들

별다른 개입 없이 담담히 돌아가는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 두 자매의 삶.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계속 한숨이 나오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 두 소녀의 모습이 죄 많은 어른의 가슴을 더욱 세게 흔들어 놓는다.

여기 예쁘고 귀여운 두 소녀가 있다. 언니는 야무지고 동생은 아직 철이 없지만 언니를 잘 따른다. 그런데 이 사랑스러운 자매에게 보호자가 없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어린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나무없는 산>. 내용만 봐서는 어릴 적 눈물샘을 적셨던 <엄마 없는 하늘아래>가 연상되지만 이 영화, 무책임한 동정심을 부추기는 신파 드라마가 아니다. 투박하고 사실적인 영화 <나무없는 산>은 정직하고 용기 있는 감독의 연출이 가슴을 움직이는 그런 작품이다.

버려진 아이들

일곱 살 여자아이 진(김희연)의 방과 후 일상은 옆집에 맡긴 동생 빈(김성희)을 데리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하러 간 엄마(이수아)가 돌아올 때까지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하는 진. 때때로 엄마에게 꾸중을 듣지만 그래도 엄마가 있어서 행복하다. 그런데 아빠 없이 근근이 꾸려가던 살림조차 감당할 수 없게 된 엄마는 자매를 지방 소도시에 사는 고모의 집에 맡기고 아빠를 찾아 떠난다. 예기치 않게 낯선 환경에 놓이게 된 진과 빈. 영문도 모른 채 엄마가 떠나간 대문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어린 눈망울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직은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이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라는 보호막이 없는 세상은 너무나 가혹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설명되지는 않지만 혼자 살며 늘 술병을 끼고 사는 고모. 벌이가 시원찮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그녀에게 남동생 부부가 남기고 간 아이들은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어른들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자매는 고모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서서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간다.
배가 고프면 고모에게 밥을 달라고 하고, 동네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다보면 어느 새 해는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도 삶에 드리운 그늘을 비껴갈 순 없다. 엄마와 함께 살던 도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진은 고모네 동네에서는 더 이상 학생의 신분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근처 학교의 교문 앞을 맴돌며 책가방을 메고 오가는 또래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뿐이다. 처음에는 불쌍한 자매를 어떻게든 돌봐주려고 애쓰던 고모도 하루하루 고된 삶의 무게에 눌려 차츰 아이들에게 소홀해진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고모 옆에서 밥을 못 먹어 배고픈 아이들은 그저 막막한 따름이다.
김소영 감독은 이 어린 자매의 일상을 그리는데 있어 냉정할 정도로 사실적이며 담담한 시선을 유지한다. 배가 고픈 아이들이 호빵 하나를 나눠먹고, 맛난 과자가 먹고 싶어서 낯선 동네 아이의 집으로 가서 간식을 얻어먹으며, 놀다가 옷에 흙을 묻혀온 빈이 고모에게 혼난 후 진이 동생의 옷을 맨손으로 주물러 빨 때, 찬바람에 거칠어진 아이들의 뺨을 보는 관객의 맘이 편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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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지만 경이로운 시선
돼지 저금통을 가득 채우면 돌아오겠다는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두 자매. 진은 메뚜기를 잡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팔고 받은 동전으로 돼지 배를 채우기 시작한다. 호빵 하나 사먹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천 원짜리 지폐를 십 원짜리 동전으로 바꿔가며 저금통을 하루라도 더 빨리 채우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숯검정이 묻어 손이 새까매지고 돼지 저금통의 배가 가득 차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껏 부푼 마음으로 저금통을 두 손에 고이 안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지쳐간다. 자매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한 해는 빨리도 기울고, 행여나 엄마의 모습을 놓칠까봐 목을 길게 빼고는 흙먼지 날리는 길에 외로이 서 있는 자매의 모습에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캐릭터를 만든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아이들의 일상에 개입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다. 그렇지만 카메라는 유독 아이들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하는데 그때마다 감독의 근심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정직하게 그들의 일상을 쫓는 카메라의 뒤에서, 이 어린 자매가 다칠까, 행여나 상처입을까봐 걱정하며 지켜보는 감독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렇게 말없이 지켜보는 동안 화면에 담기는 것은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동자와 앙다물어진 작은 입술이다. 대사 없이도 많은 것을 전달하는 두 소녀의 무구한 표정을 클로즈업할 때면 마음이 하릴없이 무너진다. 어른들의 무정한 말과 행동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올 때, 소녀들은 눈을 깜빡거리고 작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거나 어딘가를 쳐다본다. 언니답게 의젓하지만 밤이면 이불에 오줌을 싸는 진은 동생을 잘 보살피다가도 어느 순간 투정을 부리고 눈물을 쏟아낸다. 하지만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 주저앉은 채 복받친 울음을 터뜨린, 그 서러운 울음 이후로 진이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세상이 그들 앞에 펼쳐지지만 두 소녀의 맑은 영혼은 그리 쉽게 시들지 않는다.
아이들의 순수한 눈빛, 해맑은 미소, 그리고 어린 나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그늘까지 섬세하게 잡아내는 감독의 손길에서 아이들을 응원하고 있는 진심이 느껴진다. 잠깐 보여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앉아서 기다리는 그 무료한 시간 속에서, 아이들의 표정은 미세하게 변화하고 그들의 망설임과 떨림은 온 몸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긴 인내심의 보상은 이 어린 자매가 선보이는, 정말로 놀라운 연기다. 전문 배우가 아닌 두 소녀는 카메라 앞에서 실제 자신들의 생활인양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특별한 사건도,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그 자체로 보석 같은 존재다. 암담하고 서글픈 현실에서 아이들의 웃음은 햇살처럼 환하고, 또르르 흐르는 눈물은 어른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보석처럼 빛나는 어린 영혼
결국,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엄마의 편지 한통에 진과 빈은 고모의 손에 이끌려 더 외진 농촌 마을 외가에 맡겨진다. 지금껏 씩씩하게 버터오던 자매도 아이들을 맡을 수 없다며 고모와 언쟁을 벌이는 외할아버지의 호통에 절로 움츠려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얼굴도, 손등도 쭈글쭈글한 외할머니가 군고구마를 호호 불며 쥐어줄 때, 아이들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은 서서히 녹아내린다. 여전히 빈은 새신발이 갖고 싶다며 할머니를 조를 만큼 어리지만, 자매는 외할머니의 헤진 고무신을 보고는 돼지저금통을 털어 새 고무신을 사다 드릴 만큼 속이 여물어간다.
생전 처음 겪는 낯선 경험과 만남들을 통과하며 가여운 두 자매의 일상은 또다시 반복되지만, 외가 근처에서 땅을 파고 있는 공사현장을 비춰주는 장면에서 이곳에서의 작은 평화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아이들의 얼굴을 벗어나 그들을 둘러싼 자연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은 경이롭다. 시시각각 바뀌는 태양 빛과 구름을 따라 변하는 하늘의 빛깔은 현실의 존재가 아닌 양 아름답기조차 하다.
무심한 듯 변화무쌍한 하늘 아래 조금씩 성장하는 아이들은 세상을 조금씩 배워간다. 영화는 삶이 무수한 좌절과 거절로 이뤄진다는 냉혹한 깨달음을 안겨주지만, 엄마의 품처럼 아늑한 대지위에 뿌리내린 자연의 섭리는 연약한 희망 한 조각을 선사한다. 아이들이 결코 뿌리내리지 못할 것 같은 마른 나뭇가지를 손에 쥔 채 산에 오를 때, 흙에다 심고 물을 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그 맑은 영혼을 볼 때, 비정한 현실은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버려지고 방치된 그 시간들을 오롯이 견디며 한 뼘씩 자라나는 아이들은 죄 많은 어른들을 위로하며 부끄럽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진과 빈이 동네 뒷산에 오르며 부르는 노래. “산 위로 올라가고 싶어, 산 뒤로 내려오고 싶어. 강에서 헤엄치고 햇볕 쬐고 모두에게 잘하고 싶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음악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 귀엽다가도 이내 갑절의 절망과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이 여린 아이들은 단지 친구를 사귀고 자연 속에서 뛰어놀며 아무 근심 없이 노래를 부르고 싶을 뿐인데, 무심하고 나약한 어른들은 왜 이 작은 꿈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걸까. 어느 순간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황량한 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게 된다. “부디 이 아이들이 무사히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엄마를 꼭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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