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벨을 든 소녀들 <킹콩을 들다>
영화 <킹콩을 들다>는 2000년 전국체전에서 15개 금메달 중 14개 금메달과 1개 은메달을 휩쓴 순창여고 역도팀의 실화를 토대로 만든 스포츠영화이다. 핸드볼만큼이나 비인기 종목인 역도와 여성 선수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호평을 받은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계보를 잇는다. 평범한 학원드라마에 머물 수도 있었을 <킹콩을 들다>에 생동감을 부여한 것은 역도부 6인방을 연기한 젊은 배우들의 호연과 코치 역할을 맡은 배우 이범수의 관록 있는 연기다.
영화는 중반까지 시골 학교 역도부 소녀들의 개인사와 성장담에 집중한다. 전직 국가대표 역도선수였지만 지병으로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루저’ 취급을 받던 이지봉(이범수)이 역도부 코치로 소녀들과 만나면서 이야기는 풍성해진다. 영화는 저마다 상처를 안고 있는 시골 아이들과 이지봉이 만나서 어떤 시너지를 일으키며 변화하는지, 성공한 역도선수로 성장한 영자(조안)의 기억 속에 과거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에 대해 섬세하게 담아낸다.
여섯 명의 역도부 아이들은 각자 고민과 사연이 있다. 영자는 고아이고, 현정은 왕따이며, 여순은 아픈 엄마를 걱정한다. 보영은 뚱뚱한 몸이 부끄럽고, 민희는 패션에 민감하며, 수옥은 엉뚱한 모범생이다. 이들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시골 소녀다운 순박함과 순수함으로 난관을 돌파하는 뚝심을 보여준다. 어른들의 욕심으로 얼떨결에 급조된 역도부, 역도의 ‘역’자도 모르는 소녀들은 추운 날씨에 역도복 하나만 걸친 채 운동장에 집합하는가 하면,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똥을 싸는 민망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굴러가는 나뭇잎만 봐도 웃음을 터뜨린다는 10대 소녀들답게 이들의 일상은 즐겁고 유쾌하다. 엉성한 훈련 과정에서 빚어지는 실수와 에피소드는 가식 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디테일한 상황과 대사로 구축된 학교생활은 생생하며, 소녀들은 때때로 애처롭지만 귀엽기 그지없다. 모든 배우들이 힘들게 연습한 덕분인지 역도신도 어색하지 않다. 코미디와 훈훈한 정서가 잘 어우러진 영화는 무거운 바벨을 머리 위로 씩씩하게 들어 올리는 소녀들의 기합처럼 기운차다.

편견을 날려버리는 소녀들 <위핏>
영화 <위핏(Whip It)>은 일찌감치 제작자로 겸업을 선언한 배우 드루 배리모어의 첫 연출작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할리우드에서 드루 배리모어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젊은 배우도 드물 것이다. 생후 11개월 때 광고모델로 데뷔, 7세 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로 전 세계에 얼굴을 알렸던 그녀는 너무 일찍 연예계라는 정글에 발을 담근,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스타였다. 그녀의 감독 데뷔작인 영화 <위핏>에는 그녀의 인생 편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
주인공 블리스(앨렌 페이지)는 열일곱 살이나 먹었지만 외박 한 번 해본 적 없다. 미인대회에 한이 맺힌 엄마 때문에 주말마다 드레스를 입고 내키지 않는 요조숙녀 행세를 하느라 진이 빠진다. 그런데 반항할 용기도, 특출한 재능도 없는 평범한 소녀 블리스에게 예기치 못한 기회가 찾아온다. 인근 도시 오스틴에 놀러 간 블리스는 주말마다 젊은이들이 ‘롤러 더비(Roller Derby)’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활보하는 또래들을 만나 생전 처음 느껴보는 흥분에 고무된 그는 며칠 뒤 오디션에 참가해 정식 멤버가 된다.
롤러 더비는 단순해 보이지만 룰도 있고 스릴이 넘치는 경기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여자만이 참가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미성년자는 안 되지만, 17살의 블리스는 나이를 속이고 부모님 몰래 롤러 더비에 참가한다. 체구는 왜소하지만 스피드 하나만큼은 타고난 블리스. 투지는 좋지만 속도전에서 밀렸던 헐스카우트팀은 날쌘 블리스를 영입하면서 승승장구하고 결승전에 오른다. 하지만 블리스의 진짜 상대는 롤러 더비에서 1등을 놓친 적 없는 상대팀 선수 메이븐(줄리엣 루이스)이 아니라 고집불통 엄마(마샤 게이 하든)다.
짙은 스모키 화장에 미니스커트, 망사스타킹을 신고 몸싸움과 스피드로 승부를 가리는 롤러 더비는 미식축구만큼 거친 게임이다. 당연히 보수적인 부모님은 이 게임을 이해할 수 없다. 딱히 꿈도 없지만 남들처럼 얌전히 살고 싶지는 않은 블리스는 이 신세계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남부 텍사스에서도 한갓진 시골 마을, 손님이라곤 노인네들이 전부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블리스는 큰 도시로 나가고 싶어 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한 10대 소녀에게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거칠게 사는 언니들은 선망의 대상이다. 블리스는 롤러 더비에 참가하면서 해방감을 만끽한다.
유머와 철학이 담긴 성장담
고정관념과 관습에 대항해 자아를 찾으며 성장하고, 숨겨져 있던 재능을 발휘해서 도전하며 성취감도 맛보는 이야기. 익숙한 내용이지만 <위핏>이 남다른 점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의 독창성과 감독의 철학이다. 롤러 더비 최고의 인기스타로 급부상한 블리스와 인기를 빼앗긴 상대팀 리더 메이븐(줄리엣 루이스)과의 관계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로 규정되지 않는다. 승부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지만 레이스를 벗어난 메이븐은 블리스가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쿨한 인생의 선배다.
또한, 생소한 스포츠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 활력을 더한다. 롤러 더비는 미식축구나 아이스하키의 몸싸움뿐 아니라 쇼맨십까지 필요한 스포츠다. 어른들의 눈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하는 쌈박질로 보이겠지만 선수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넘친다. 영화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은 배우들의 역동적인 롤러 더비 장면들은 짜릿한 흥분과 유쾌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넘치는 에너지와 사랑스러움으로 시종일관 미소를 띠게 한다는 점이다. 미숙하지만 당찬 청춘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아낌없이 발산한다. 전작 <주노>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줏대 있는 소녀 역을 잘 소화해 낸 배우 엘렌 페이지는 블리스 역에 적격이다. 마샤 게이 하든의 안정적인 연기와 조연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도 <위핏>의 짜임새를 탄탄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감독 드루 배리모어가 다혈질 선수로 등장한 이 영화는 그의 영상 자서전 같다. 스스로 체득한 인생에 대한 통찰력, 반항심과 고집, 용기와 자신감, 도전정신이 넘쳐 난다. 그리고 후배이자 또래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선 격려와 연민, 깊은 공감이 느껴진다. 자신의 삶의 궤적이 담긴 대사 하나에도 진정성이 배어난다. 메이븐이 “내 나이 서른여섯이고 서른한 살에야 내가 잘할 수 있는 롤러스케이트를 만났다”고 말하는 장면은 배리모어 자신의 고백처럼 들린다.
이에 비해 영화 <킹콩을 들다>의 후반부는 신파드라마로 급선회하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역도부 학생들이 고교에 진학하자, 이지봉과 대립하던 여고의 역도 코치가 그들을 갈라놓고 스승과 헤어진 소녀들은 힘을 잃는다. 이후 비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관객의 눈물을 위해 소녀들은 비인간적인 손찌검과 발길질까지 감내해야 한다.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사제 간의 정으로 극복한 드라마는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지나치게 도식적인 감독의 이분법은 오히려 감동을 희석시킨다.
동일하게 10대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위핏>과 비교했을 때 이런 아쉬움은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있고, 메달 색깔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역도 선수들과 롤러 더비 선수들을 단순 비교하긴 무리지만, 인간 승리의 감동드라마를 지나치게 선호하는 한국적 정서가 안타깝다. <위핏>의 블리스가 속한 팀은 결국 2등에 머물지만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다. “2등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서로를 격려한다.
모든 사실이 발각된 블리스가 대회를 포기해야 하는 위기를 극복해가는 과정도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다. 완고해 보였던 부모님이 블리스의 진심에 마음을 열면서 변화되는 모습, 블리스가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등 인생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선이 부럽다. 진지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담긴 독창적인 성장영화를 한국에선 언제쯤이나 볼 수 있을지,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