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과를 알아도 피할 수 없는 감동 <맨발의 꿈>
2004년 유소년축구계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국인 김신환 감독이 이끄는 동티모르 청소년축구팀이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리베리노컵 국제유소년 축구대회에서 강호 일본을 꺾고 6전 전승으로 우승한 것이다. 영화 <맨발의 꿈>은 이 동티모르 청소년축구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화산고>의 김태균 감독이 연출한 스포츠 영화다.
한때 각광받는 축구선수였던 원광(박희순)은 운동을 그만둔 후 연이어 사업에 실패한다.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동티모르로 간 그는 현지 어린이들이 맨발로 축구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스포츠용품점을 차린다. 대사관 직원인 인기(고창석)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한 동네에서 축구 용품이 팔리겠느냐며 만류하지만, 원광은 축구화를 살 여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일단 신발을 나눠준 뒤 매일 일 달러씩 돈을 갚으라고 말한다.
<맨발의 꿈>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돈을 벌기 위해 가난한 아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이용하던 철없던 인물이 아이들의 순수함과 열정에 감동받아 진심으로 그들을 돕게 되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꿈도 되찾는 과정을 다룬다. 익숙한 서사 구조를 따라가다 보니 드라마의 전개 방향도 예측하기 쉽다. 신과 신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느낌도 종종 든다. 더구나 영화의 소재가 된 김신환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본 관객이라면 클라이맥스라 할 최종 경기 결과까지 이미 알고 있으니 맥이 빠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 모든 약점을 안고 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재미있고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본 뒤에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눈에 밟힐 정도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어깨에 힘 빼고 실화가 가진 감동을 소박하게 스크린에 담아낸 감독의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신환 감독의 이야기를 TV 다큐 프로그램에서 처음 접한 김태균 감독은 그를 만나기 위해 직접 동티모르를 찾았다. 영화제작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한 그곳에서 더위와 열악한 제작여건과 싸우며 따끈따끈한 휴먼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이 작은 영화를 생생하게 살려낸 또 다른 축은 배우들의 열연이다. 주연을 맡은 박희순은 코믹함과 진지함을 유연히 오가며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연기를 선사한다. 특히 한국어와 영어, 인도네시아어와 동티모르어까지 한 문장 안에 4개의 언어를 섞어서 절묘한 리듬으로 대사를 처리하는 그의 모습에 관객들은 포복절도하게 된다. 밝고 유쾌하게, 때로는 애처롭게, 어떤 모습에서든 다양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의 카리스마는 영화 안에 부드럽게 녹아든다. 상대 배우의 연기를 돋보이게 해주는 훌륭한 조연배우 고창석과의 연기궁합도 잘 맞는다.
박희순이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야 돼?”라며 울분을 토하고 “맨날 시작은 하는데 끝을 본 적이 없었어. 쟤들과 함께 하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어”라고 자신의 진심을 드러낼 때, 급기야 “이게 마지막이 아니고 그 다음이 있다는 게 눈물 나게 고마워”라며 눈물을 흘릴 때 그의 대사들은 마음을 파고든다. 가난과 내전이 일상이 된 험악한 현실 속에서도 축구화 하나로 꿈을 꾸는 소년들은 어렵사리 출전한 경기에서 사력을 다하고, 바다 건너서 전해지는 잡음 섞인 전화 중계를 듣기 위해 함께 모인 가난한 이웃들이, 두 손을 모아 어린 용사들을 응원할 때 관객도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팍팍한 인생사에 지쳐 쓰러졌다가 다시금 용기를 회복하는 고단한 주인공의 삶은 어느새 남이 아닌 내 얘기로 다가온다. 그와 함께 웃고 화내고 감격하다가 그만 눈가가 촉촉해진다. 21세기 최초의 독립국이자 영화라곤 찍어본 적이 없는 가난한 나라 동티모르에서,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현지 아이들(실제 청소년 축구팀에 속한 아이들을 포함해)을 캐스팅한 김태균 감독은 그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운 듯하다. 프로 배우와 아마추어 배우, 다른 언어와 다른 피부 빛깔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뒤섞여서도 멋진 화음을 창조해낸다.

선입견에 대한 소녀들의 유연하고 경쾌한 도전 <슈팅 라이크 베컴>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진 천방지축 소녀들의 축구 도전기 <슈팅 라이크 베컴(Bend It Like Beckham)>은 고정 관념과 편견을 유쾌하게 뒤집는 영화다. ‘축구〓남자들의 것’이라는 선입견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인종적 편견과 계급적 차별과 같은 진지한 문제에도 시원한 킥을 날린다. 씩씩하고 경쾌하게!
런던에 사는 인도 소녀 제스(파민더 나그라)의 꿈은 베컴 같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역시 축구선수를 꿈꾸는 영국 소녀 줄스(키이라 나이틀리)의 권유로 여자 축구단에 입단하지만, 영국에 살면서 인도인의 전통 가치를 고수하는 제스 부모의 눈에는 허벅지를 드러내놓고 축구장을 뛰어다니는 딸이 마음에 들 리 없다. 부모를 설득하러 찾아온 코치 조(조나단 라이스 마이어스)에게 제스의 아버지는 “나도 한때 촉망받는 크리켓 선수였지만 영국에 오니 아무도 안 받아줬다. 남자도 안 되는데 여자가 되겠느냐”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한다. 한편, 영국인인 줄스의 부모는 축구선수가 되려는 딸을 지원한다.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은, 남녀 차별과 영국과 인도의 문화 차이, 모국을 떠난 이방인의 설움,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가 빚어내는 충돌 등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 장치들에서 강한 대립각을 설정해 놓았다. 하지만, 그런 차이와 차별에 대한 불평과 콤플렉스를 늘어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신세대의 발랄함과 건강함을 보여 준다. 이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용감한 소녀 제스는 차이를 그저 ‘다른 것’으로 인식할 뿐 마냥 분개하지도, ‘나는 안 될 거야’라며 포기하지도 않는다. 결승전에서 제스가 찬 볼이 네트를 가르는 순간과 결혼에 목숨 건 제스의 언니 핑키(아치 판자비)의 결혼피로연 파티 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후반부는, 각자가 선택한 삶에서 당당하고자 하는 두 사람의 노력에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줄스 엄마의 코믹한 연기도 일품이고 <벨벳 골드마인>에서 글램록 가수로 열연했던 모습을 싹 지운 채 풋풋한 청년으로 변신한 조나단 라이스 마이어스 등 조연들의 든든한 앙상블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덧입힌다. 인도계 영국인인 여성감독 거린더 차다는 여성이자 서양에서는 이방인인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 진지한 주제와 축구라는 소재의 조화를 훌륭하게 이끌어냈다.
<슈팅 라이크 베컴>의 원제는 ‘Bend It Like Beckham’이다. 영국의 축구 영웅 데이비드 베컴의 특기인 바나나킥처럼 휘어서 차는 커브 슛을 뜻하는 말이다. 제목처럼, 등장인물들은 대립과 차별을 정면 돌파하기보단 유연하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축구 선수들은 ‘거친 근육질의 남자’라는 선입견을 깨뜨린, 이 잘생기고 패셔너블한 남자 베컴은 소녀들의 우상이며 신세대적 취향에 어필하는 쿨 한 스타이다. 그의 중성적 이미지는 이 영화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지극히 인간적인 맨 얼굴로 전하는 진정한 감동
스포츠와 휴먼 드라마의 결합이 뻔한 영웅담의 길을 걸어가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맨얼굴로 관객의 진심에 호소할 때 그 매력은 배가된다. <맨발의 꿈>과 <슈팅 라이크 베컴>의 감동도, 극적인 경기 장면이 아니라 인물들의 희로애락이 살아 있는 표정을 클로즈업할 때 솟구친다.
특히 <맨발의 꿈>처럼 실화를 다룬 경우, 소년들이 이 영화 한 편을 넘어서 그 척박한 땅에서 자신들의 삶을 계속해서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이 관객을 무장해제시킨다. 가진 것은 없지만 가슴 속에 꿈을 간직한 소년들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고 자막으로 각자의 이름이 새겨질 때, 극장을 나와서도 그 아이들의 환한 미소를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감독의 이런 세심한 배려는 극장을 찾아 영화를 끝까지 지켜보는 관객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