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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길의 소중한 동반자

작년 모 방송국의 <세시봉 콘서트>로 고조된 복고 열풍이 여전한 가운데 각 방송사의 프로그램에서 70~80년대의 인기 음악과 스타들에 대한 향수가 넘쳐나고 있다. 이런 시기에 40대 여성들의 추억 여행을 유쾌하게 담아낸 영화 <써니>의 돌풍은 어쩌면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강형철 감독의 섬세한 손맛이 빚어낸 <써니>와 <과속스캔들>을 살펴보자.

<써니>, 추억 속 친구 찾기


<써니>는 아역과 성인 배우를 합쳐 14명이나 되는 중심인물과 조연 배우들까지 수십 명이 등장해 산만할 수도 있는 영화다. 그런데 강형철 감독은 인물과 에피소드들의 홍수 속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으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성을 매끄럽게 이어 붙인다. 가령, 현재의 나미(유호정)가 고등학생 딸의 학교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에서 재잘거리는 여학생들을 한 바퀴 훑은 카메라가 다시 돌아왔을 때 비추는 인물은 과거의 여고생 나미(심은경)다.
과거로의 추억 여행 출발지인 이 장면은 어른 나미의 아련한 표정과 십대 나미의 긴장된 표정이 교차되면서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킨다. 40대 주부인 나미는 돈 잘 버는 남편과 예쁜 딸을 둔,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게 없는 여성이다. 하지만 사업하느라 바쁜 남편과 사춘기 딸로 인해 인생이 외롭고 허무하다. 나미는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교 친구 춘화가 시한부란 사실을 알게 되고, 춘화의 부탁으로 고교 시절 서클 ‘써니’에서 함께한 친구들을 찾으러 다닌다.
스토리의 중심축인 ‘친구 찾기’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던 나미에게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미션이자 관객들의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매개체다. 나미가 추억 속 십대 시절을 떠올리며 ‘써니’의 존재가 드러나고, 과거와 현재가 대비되는 일곱 인물들의 사연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영화는 긴장감과 소소한 재미를 제공한다.
<써니>를 보고 나면 제작 과정에서 감독이 가장 고심했을 캐스팅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과속스캔들>, 한 남자의 성장 이야기


2008년 겨울, <과속스캔들>이라는 제목의 데뷔작을 내놓은 강형철 감독의 성공은 당시 영화계의 화젯거리였다. 작은 스케일과 신인 배우, 그리고 삼대의 과속 이야기라는 소재가 우려를 낳았던 만큼, 모두들 이 영화의 흥행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필자도 흐뭇하게 봤던 이 영화에서 가장 칭찬해 주고 싶은 점은 배우들의 호연과 감독의 매끄러운 연출 감각이다.
왕년의 스타, 지금은 라디오 DJ로 연예인의 생활을 이어가는 남현수(차태현)의 삶은 완벽해 보인다. 세련된 펜트하우스에 살고 스캔들 한 번 내지 않은 채 비밀스런 연애를 즐긴다. 아이돌 스타로 유명세를 떨치던 그때 만큼은 아니지만 충성스러운 팬 층을 유지하고 있다. 깔끔한 외모에 유들유들하면서 어딘가 까칠하고 빈틈이 엿보이는 삼십대 중반의 독신남. 위트 있지만 미성숙한 소년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배우 차태현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이다.
그렇게 평탄하게 살던 현수의 인생에 갑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의 애청자 황정남(박보영)이 꼬마 아이(왕석현)를 데리고 현수를 찾아와 다짜고짜 가족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은 남현수가 중3 때 실수로 낳은 딸이며, 데리고 온 아이는 그의 손자 황기동이라는 것. 어쩌다가 이들 모자가 펜트하우스에 눌러앉게 되면서 현수의 삶은 꼬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핏줄을 외면하려는 현수와 자기 할 말은 또박또박 다하는 성숙한 정남의 설전, 의뭉스러운 깜찍함을 선보이는 기동의 협공까지 세 사람이 엮는 에피소드들은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감독이 강조하는 방점은 이기적인 현수의 성장드라마에 찍힌다. 철없던 시절의 실수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족이 현수의 인생을 바꾸어 놓게 된다.
<과속스캔들>은 신인 박보영과 아역배우 왕석현을 단숨에 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미혼모 연기, 상당한 가창력이 요구되는 노래에 기타 연주까지 소화하며 신인이라기엔 놀라운 집중력을 선보인 박보영과 꾸밈없는 애교로 ‘엄마 미소’를 짓게 한 왕석현의 연기는 이 영화의 활력소이자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힘이다.

현재의 힘이 되는 과거
<써니>는 80년대 중반에 유행했던 대중문화들을 곳곳에 배치해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낸다. 나이키 신발과 조다쉬 청바지, 써니텐 음료, 디스코 댄스와 가수 나미의 ‘빙글빙글’. 음악다방의 디제이로 대변되는 그 시절 십대들의 문화는 30~40대 관객들에게 친숙하다. 소녀들의 로망이었던 외국 영화 <라붐>의 헤드폰 신을 그대로 재현한 첫사랑 오빠와의 에피소드는 유치하지만 가슴을 설레게 한다. 뻔한 코드이지만 청춘의 활기와 웃음이 눈물과 버무려지면서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관객들은 첫사랑을 가슴 속에 묻어야 했던 나미의 눈물에 공감하고 친구들의 우정과 의리에 감동한다. 영화 제목처럼 환한 ‘햇살’ 같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린다. 밤새워 쓰던 연애편지나 비밀 일기장 같은 추억들은 현실의 삶에 지친 이들을 잔잔하게 위로한다. 과거라는 이유만으로 실제보다 과하게 채색된 판타지를 덧씌울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한 줌의 기억이 현재를 밀고 나갈 힘이 되기도 한다.
<써니>가 선사하는 또 다른 매력은 영화의 감성을 풍성하게 해주는 배경음악들이다. 보니엠의 <써니>, 턱&패티의 <타임 애프터 타임>, 조이의 <터치 바이 터치> 등을 선곡한 감독의 뛰어난 안목은 <과속스캔들>에서 박보영이 부른 노래 <아마도 그건>에서 이미 입증된 것이다. 감성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유쾌한 에너지가 가득한 에피소드를 쌓아 올린 후,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콧등 시큰한 감동을 선사하는 연출력이 바로 두 영화의 흥행 비결일 것이다.
<써니>는 마지막 장면과 엔딩 크레디트까지 예기치 못한 뭉클함을 안겨준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겨우 한자리에 모이게 된 그녀들의 우정의 무게는 묵직하고, 떠난 이는 남아 있는 이들에게 제 몫까지 씩씩하게 살아달라고 부탁한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수지는 ‘써니’에게 마음의 빚이었다. 하지만 편안하고 성숙한 얼굴로 나타난 그녀의 깜짝 등장은 친구들을 위로하기 위해 춘화가 주고 간 최고의 선물이다.
세월이 가고 친구들은 늙고 병들면서 하나씩 떠나간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인생은 어쩌면 참 쓸쓸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빈부와 계층, 욕망의 성취 여부를 떠나 누구나 예기치 못한 이별과 예정된 죽음을 맛보는 우리의 인생. 그렇기에 미래의 추억이 될 오늘 하루는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 인생길에서 웃고울어줄 가족, 친구 한 명이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만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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