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醫員)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에 어느 나라 신선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 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平安)도 장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
의원(醫員)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아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醫員)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이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백석
서정시의 세계는 세계와의 동일성을 지향하고 있다. 동일성의 세계는 시적주체와 세계가 하나 혼융된 상태를 말한다. 백석의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주관적 세계로 형상화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낯선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시적 화자가 의원과의 대화를 통해 따스한 고향의 정을 느끼는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 서정적 자아인 백석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다른 세계인 의원을 ‘손길’ 이라는 낱말 속에서 아무개 씨를 알고 있는 공통점을 통해 동일시하고 있다. 즉 세계는 자아와 동일시되어 구별되는 세상이 아닌 나와 그는 끈끈한 혈연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세계가 의원을 통해 그리운 공동체의 끈끈한 그리움이 표출되고 있다.
백석이란 시인을 말할 때 그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아름다운 북녘의 사투리가 살아 있는 시 속에서 그는 서정시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그의 시를 읽으면 흰 눈 내린 겨울산 기슭에 서 있는 듯하다. 그의 단어 속에 나오는 북쪽 사투리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서러운 듯한 그의 어조에서 무심히 윙윙 소리를 북녘의 바람 소리가 들리고, 흰눈 내리는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우리들을 서정시의 세계로 그이 서정 속으로 동일화 시킨 때문일 것이다.
처음 백석의 시를 대하고 밤새 읽으며 모던보이의 모습이 밤새 아른거렸다. 그의 사랑, 그의 시, 그의 북쪽 땅은 차갑고 아름답고 희고, 슬프고 향기로왔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싸아한 박하향이 날듯하고, 차가운 눈이 내 볼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에 선택했던 시는 ‘여우난 곬족’, 그 다음에는 ‘북방에서 ’다시 ‘남신의주 유봉 박시봉방’ 이렇게 백석 시전집을 왔다갔다 하였다. 그리고 백석의 사랑, 자야여사의 글 ‘내 사랑 백석’을 떠돌았다. 결국, 외로운 그가 흰 눈 내리는 겨울풍경을 닮은 그가 조금 덜 외로운 시를 택하고 다시 읽으며 마친다. 아픈 그가 아버지처럼 따뜻한 손길로 진맥하는 의원을 만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이 되는 시이기에.
『백석 시 전집』, 저자 송준 (엮음), 흰당나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