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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

낭송 춘향전

우수(雨水) 절기를 지난 강마을은 봄의 시작입니다. 논둑에는 뽀얀 쑥이 머리를 내밀고, 매화가 하얀 얼굴로 몇 송이 인사를 합니다. 볕살 좋은 양지에는 파아란 봄까치꽃과 진홍 광대나물꽃의 벌써 꽃망울이 올망졸망 피었습니다. 

그네들은 아직도 바람살이 매운 이 계절, 한 줌의 햇살에도 잎사귀를 돋우고 그 힘으로 작고 여린 꽃송이를 내밉니다. 그리곤 배고픈 벌들을 불러들입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대기업의 횡포에 맞설 수 없어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처럼 큰 나무의 잎이 피기 전 바람살 매운 겨울의 끝자락이면 바지런 바지런 잎을 곧추고 꽃을 피웁니다. 큰 나무의 잎들이 기지개를 켜는 3월이면 그네들의 작은 꽃들은 여리디 여린 열매를 맺습니다. 힘없는 풀들의 생존전략입니다.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도 권력이었습니다. 천하디 천한 기생의 딸이었던 춘향이 양반의 아들을 만나 사랑하고 그 사랑을 굳게 지켜 정실부인이 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어미가 기생인 경우 딸 역시 기생의 신분인 것이 당연한 시대에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는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어 목숨 걸고 사랑한 춘향은 정말로 주체적인 여성입니다. 내 몸의 주인은 나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현대의 여인들보다 더 적극적인 사랑을 원합니다. 내 사랑을 선택하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봄향기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여자 ‘춘향전’을 봄볕 내리쬐는 강마을 중학교 벤치에 앉아 두런 두런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이 책은 고미숙 선생이 기획하고 길진숙과 이기원이 풀어읽은 낭송에 적합한 책입니다. 완판계열 방각본인 '열녀춘향수절가'를 판본으로 삼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문과 고어를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서 읽는 맛이 참 좋은 책입니다.

춘향의 말과 이도령의 말을 낭송하다 보니 이팔청춘의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 속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찰진 말들이 만들어 내는 언어의 향기와 푸르고 붉은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느껴질 것입니다. '낭송 춘향전'에 대한 소개의 글에서 낭송의 즐거움을 18세기 박람강기의 대가 이덕무의 마을 빌려 말합니다.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낭송하면 눈은 글자에, 마음은 이치에 집중한다. 그러면 천만 가지 생각이 일시에 사라져 보린다.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막힌 것을 통하게 한다. 그러면 기침 소리가 갑자기 그쳐 버린다.”

 

여봐라 춘향아 저리 가거라. 가는 태도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도를 보자. 방긋 웃어라.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도를 보자. 너와 내가 만난 사랑 연분을 팔자 한들 팔 곳이 어디 있나. 생전 사랑 이러하니 어찌 죽은 후에 기약이 없을쏘냐. 너는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글자 되되 땅 지(地) 자, 그늘 음(陰) 자, 아내 처(妻) 자, 계집 녀(女) 자 변이 되고, 나는 죽어 글자 되되 하늘 천(天) 자, 하늘 건(乾)자, 지아비 부(夫)자, 사내 남(男)자, 아들 자(子)자 몸이 되어, 계집 녀(女) 변에다 딱 붙여 좋을 호(好) 자로 만나 보자. 사랑 사랑 내 사랑. /P77

여보 도련님. 지금 막 하신 말씀 참말이요, 농담이오? 우리 둘 처음 만나 백년언약 맺은 일도 대부인과 사또께서 시키시던 일이니까? 핑계가 웬일이오. 광한루에서 잠깐 보고 내 집에 찾아와서 인적 없는 한밤중에 나는 여기 앉고 도련님은 저기 앉아 날더러 말하지 않았소. ‘언덕 같은 맹세도 내 맹세만 같지 않고, 산 같은 맹세도 내 맹세만 같지 않다.’ 오월 단오 밤에 내 손을 부여잡고 우당탕탕 밖으로 나와 맑은 하늘 밝은 달을 천 번이나 가리키며 굳은 언약 지키기로 만 번이나 맹세키에 내 정녕 믿었더니 마지막에 가실 때는 뚝 떼어 버리시니 이팔청춘 젊은 것이 낭군 없이 어찌 살꼬. 길고 긴 가을밤에 독수공방 이내 몸은 님 생각 어이할꼬. 모질도다, 모질도다. 도련님이 모질도다. 독하도다, 독하도다. 서울 양반 독하도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존비귀천(尊卑貴賤)원수로다. /P97

 

목숨 걸고 사랑한 그녀, 춘향을 생각하는 봄입니다. 세상은 점점 따뜻해질 것이고 여인들은 화사한 봄옷을 입고 꽃처럼 거리를 다닐 것입니다. 그러면 또다른 이도령들은 그네들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또다른 춘향이 나타나는 봄입니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봄은 그것만으로 축복의 계절이 아닐까요? 모두가 향기로운 새봄되시기 바랍니다.

 

『낭송 춘향전』, 길진숙, 이기원 풀어읽음, 북드라망,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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