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 심리학을 사람들에게 잘 소개한 책으로 ‘미움 받을 용기’가 있다. 이 말과 관련한 아들러의 용어는 ‘courage to be imperfect’다. 그런데 이를 ‘미움 받을 용기’라고 말하기는 것은 아들러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영어를 그대로 직역한 ‘불완전할 용기’가 훨씬 더 적합하다. 의역하면 ‘불완전한 존재가 될 용기’ 또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일 용기’로 표현할 수 있다.
아들러는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현재 모습 그대로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라고 격려한다.
#초등 3학년 미술 전담교사 K가 겪은 일이다. 그는 수업 내내 그림 그리기를 힘들어하다 끝내 자신의 작품을 반으로 접어 풀을 발라버린 B와 쉬는 시간 상담실에 마주 앉았다.
“상준아 오늘 미술 시간 어땠어?”
“별로였어요.”
“인기 과목인 줄 알았는데.”
“차라리 수학이 나아요. 수학은 그냥 풀면 되는데 미술은 답이 없어요. 생각대로 안 그려지니까 짜증나요.”
K교사는 B가 완벽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B에게는 ‘불완전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K교사는 완벽히 못 그려도 미술이 행복하도록 돕고 싶었다.
“아~그렇구나. 그럼 마음 속 그리기 정답과 똑같이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친구 현성이는 할 수 있을까? 그림 잘 그린다고 소문난 남주는 할 수 있을까?”
“글쎄요. 걔들도 못하겠지요.”
“그래도 그 친구들은 미술시간을 좋아하잖아.”
“공부 안 하는 시간이니까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친구들은 왜 자기 작품을 자꾸 칠판에 붙여 달라고 하지? 그냥 그린 건데?”
“마음에 드나 보지요.”
K교사는 문득 창운이가 생각났다. 창운이는 그림에 별로 소질은 없지만 미술시간에 늘 즐거워하고 그림을 칠판에 붙여 달라는 아이였다.
“그럼 잘 그리는 아이들만 자기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아?”
“꼭 그렇지는 않아요. 창운이는 못 그려도 그림 붙여 달라고 하잖아요.”
“그래, 창운이는 그렇지. 그럼 창운이는 마음 속 정답 그림하고 똑같이 그려서 그렇게 자신만만할까?”
“에이, 그럴 리가요.”
“그럼, 창운이는 미술시간이 안 즐거울까?”
“아니요. 창운이는 엄청 즐거워 보여요. 그림을 별로 못 그려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창운이를 보면 어때? 한심하게 보여?”
“아니요. 마음껏 그리고 못 그려도 신경 안 쓰니까 좋겠어요.”
“선생님도 창운이가 재미있고 귀여워.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고. 어쨌든 B야, 네가 일류화가처럼 마음 속 정답 그림과 똑같이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
“전, 과학자가 꿈인데요.”
“아, 그래? 그럼 일류화가처럼 잘 그리지 않아도 되겠네?”
“뭐, 그렇지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B의 얼굴이 아까와는 달리 밝고 편안해 보였다. 교사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불완전할 용기를 얻은 듯 했다.
K교사는 완벽한 그림을 그리려는 B에게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하다고 격려했다. 완벽하고자 하는 욕구는 발전을 주기도 하지만 엄청난 스트레스와 긴장을 유발한다.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미술 시간이 힘들기만 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활동에서 완벽을 요구하는 교육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배움의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교사는 학생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완벽을 장려하지 말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격려해야 한다. 불완전할 용기에 대한 격려가 학생들에게 성장과 배움을 맛보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많은 교사들은 스스로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의심하며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며 생활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사의 실수는 학생들에게 불완전할 수 있는 용기의 모범이 된다. 완벽하진 않지만 노력하고 있는 교사의 모습은 실수에 관대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존중하는 교실 분위기를 만드는데 큰 몫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