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의 아이가 아침부터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아이가 읽어달라는 책은 <라푼젤>. 그날따라 몸이 아픈 할머니는 모로 돌아누워 “그려 나중에 하자”, “그만 하면 됐다” 얘기하는데 아이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이혼 후 집을 나간 어 머니와 돈 벌러 집을 떠난 아버지.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쯤 집을 찾아 아이를 잠시 보고 다시 떠나기를 반복하고, 늙은 몸으로 그나마 아이를 돌보던 할머니는 요즘 들어 자꾸 몸 이 아프다며 드러눕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오늘도 <라푼젤>을 읽어달라고 조르고 또 조른다. 그리고 그 책은 어제도 여러 번 읽어주었던 바로 그 책이다.
왜 이 아이는 같은 동화책을 계속 읽어달라고 조를까?
왜 이 아이는 같은 동화책을 계속 읽어달라고 조르고 있을까? 왜 할머니가 아플 때는 더 절박하게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걸까? 어느 아동 분석사례에서 나온 이 이야기는 동화가 아이들에게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아이들이 동화 속에서 어떤 환상을 보고 싶어 하는지, 어떤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후에 분석결과를 통해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공포가 전형적인 ‘유기공포’이며,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너무도 애절하게 찾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로 아이는 엄마와 아빠를 모두 잃고 난 뒤(아이의 심리 속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니었다) 오로지 할머니 한 분을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아플 때마다 또 다시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고, 그 순간 그 공포를 이겨내는 방편 으로 <라푼젤>을 선택한 것이다. 빛이 들지 않는 높은 첨탑(아이는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에 갇혀 있는 라푼젤, 그 라푼젤에게 다가와 밝은 세상으로 구해내는 왕자. 그리고 행복해지는 라푼젤…. 아이는 자신에게도 이렇게 ‘영원히’ 구해줄 누군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고, 그것을 확신하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책을 주문처럼 읽는 것이었다. 물론 글을 읽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계속해서 읽어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주문이다. ‘좋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행복해질 거야’ 라고 외우듯 같은 동화를 반복해 선택함으로써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불안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너무 가슴 아픈 사례지만 왜 학령기 이전의 아이들이 특히 같은 동화책을 반복해서 보는지, 반복해서 찾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좋은 근거가 되는 케이스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동화는 이런 기능을 갖는다. 무엇보다 언어로 자기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어린 나이일수록 드러낼 수 없는 무의식, ‘말해질 수 없는’ 트라우마, 깊은 소망 등을 이렇게 동화를 ‘선택함으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 어른들은 어떨까?
그럼 어른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무의식, 트라우마, 소망 등을 드러낼까? 그것은 바로 ‘꿈’이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특정한 동화에 반응하고 그 속에서 자극을 깨워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른이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첫 번째 방편은 ‘꿈’이다. 우리가 프로이트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도 바로 이 ‘꿈’인데, 그 이유는 사람의 꿈을 해석한다는 것, 분석한다는 것이 마치 동굴 속에 숨겨진 암호를 풀어내는 것처럼 설레고 매력적인 일이어서 누구나 관심을 두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다만 피분석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꿈이 해석 ‘당한다’ 싶으면 약간은 두려움까지 느끼는 게 사실인데 이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이 ‘얘기된다’, ‘드러난다’는 것에 대한 일차적 불안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꿈’ 분석을 통해서는 바로 그런 개인의 깊이 숨겨진 것, 억압된 것, 오래된 소망 등이 드러나는 게 사실이다. 이게 무의식이다.
그럼 꿈을 분석하는 중요한 ‘틀’은 무엇일까? 무엇을 통해 꿈 분석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바로 ‘상징’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상징’의 영어표현이 명사로서의 ‘symbol’이 아 니라(일대일 대응방식이 아니라) 형용사인 ‘symbolic’이라는 것. ‘상징의, 상징하는, 기호적인’ 즉, 상징적인 ‘방식’으로 꿈 분석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접근해 볼 한 가지가 있다. 아이들이 읽는 전래동화 역시 대체로 이 무수한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앞서 여러 경우에서 살핀 것처럼 동화 속에는 각 시대와 문화를 반영한 그리고 때로는 모든 문화권에서 통용될 만한(집단무의식) 상징들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꿈과 동화는 묘한 상동성을 갖는다. 그리고 ‘꿈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일찍이 이 부분에 주목한다. 의사이기도 했던 프로이트는 처음엔 최면술 등을 통해 사람의 무의식에 접근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함을 느끼면서 이후 본격적인 꿈 분석에 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만난 환자들의 많은 수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데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하나의 상징처럼 사용하는 것을 알아챈다.
결국 오랜 시간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이 버무려지고, 첨삭되고, 갈무리되면서 만들어진 전래동화 속의 상징들이 사람의 꿈에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덕분에 동화를 분석하는 것은 또 하나의 꿈을 분석하는 것과 같은 효과와 결과를 낳는다.
그럼 창작동화는 읽히지 말아야 할까?
그러나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동화나 한국의 전래동화처럼 ‘전래돼 온’ 동화와 창작동화는 다르다는 것. 오랜 시간 일종의 퇴적물처럼 쌓이고 쌓여온 전래동화는 사람들의 풍습과 관습, 집단무의식 등이 깊이 새겨져 있지만 창작동화는 작가 1인에 의해 창작되다 보니(간혹 여러 명이 함께 작업하는 집단 창작물도 있다) 이런 상징성을 찾는 문제에서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로 들 수 있는 동화가 ‘안데르센 동화’다. 덴마크 출신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미운 오리 새끼>, <눈 의 여왕>, <엄지 아가씨>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수많은 동화를 ‘창작’한 작가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의 작품들은 유난히 ‘슬픈 결말’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성냥팔이 소녀>와 <인어공주>이다. 유난히 어렵고 불우했던 그의 어린 시절을 투영하는 동화들 이라는 뒷얘기가 나오고 있을 만큼 안데르센 몇몇 동화는 매우 비극적이다.
그런데 1800년대 비슷한 시기에 민담에 구전되던 이야기를 채록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나온 그림동화는 비극적인 결말의 이야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구전과 창작의 차이다. 물론 동화로 옮겨지지 못한 더 많은 구전 민담들 가운데 슬픈 결말을 갖는 것도 상당수있겠지만 최소한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서는 그런 비극적 결말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옳다. 실제로 그림동화를 보면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던 주인공이 ‘반드시’ 그 어려움을 극복해 결국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결말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의도적인 모호한 시대성(옛날 옛적에~), 구체화되지 않는 지명(어떤 마을에~) 그리고 늘 행복한 결말은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고민과 ‘언어화되지 못하는’ 아이들의 무의식 속 상처를 받쳐주는 일종의 안전매트와 같은 것이다. 그런 동화를 읽고 들으며 아이들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앞서 라푼젤을 듣고 또 들으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귀가를 꿈꿨던 아이처럼 말이다.
그럼 창작동화는 읽히지 말아야 할까? 물론 잘 구분해서 읽히면 된다. 다만 가능하면 6세 이전까지는(오이디푸스 기간) 더 신중을 기해 아이들의 동화를 고를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