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작업복을 입고 찾아온 일감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놓치고 만다.” 아침에 읽은 책에서 본 토마스 에디슨의 금언입니다. 이 말은 하루 종일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기회’라는 말의 의미는 화려하고 멋진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힘들고 하기 싫은 일감처럼 찾아와 우리를 시험합니다. 고난이 곧 기회일 수 있습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정말 어렵고 힘든 시절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시절을 견디지 않았다면 저의 오늘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쇠귀 신영복 선생은 자신의 감옥살이를 대학시절이라 부릅니다. 신영복 선생은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20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988년 광복절 특별가석방을 받아 출소했습니다. 출소한 날 수감 생활을 하며 느낀 소회와 고뇌를 편지 형식으로 적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하여 지금도 많은 이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지금의 신영복 선생의 올곧은 단단함을 있게 한 것은 한 발도 나갈 수 없는 감옥 속에서 겪은 힘들고 길고 아득하고 끔찍한 세월일 것입니다. 그 분의 내면의 견고함을 대할 때면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나무야 나무야』는 선생님께서 출소 한 후 이 땅 곳곳을 직접 발로 밟으면서 적어간 25편의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의 첫 장에 “어리석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라는 문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저는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합니다. ‘약은 고양이가 밤눈 어둡다’라는 속담처럼 당장 보기에 이익이 될 것 같은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영리한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게 보일 지라도 힘들지라도 이 일이 옳다면 그 길을 가야겠지요.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저 역시 선생의 말씀처럼 어리석게 살고 싶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안함' 그것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들지 않는 물입니다. p. 82
요즘 참 춥습니다. 흰 테를 두른 강가엔 스산한 갈대잎이 바람에 우수수 소리를 내고 교회 아래 벼랑에는 철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벼랑의 이름을 동네 어르신들은 ‘마라구지’부릅니다. 제가 무슨 뜻인지 여쭈어 보니 ‘말의 아구지’(입의 비속어, 경상도 사투리)라고 합니다. 풍수상으로 학교 주변의 땅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입에 해당하는 부분이 교회 아래 벼랑이라나요. 강이 얼고 가뭄으로 말라서 말의 물을 먹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모두가 힘든 시절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작업복을 입고 찾아온 일감처럼 찾아온다고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독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따뜻하게 입으시기 바랍니다.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지음, 돌베개,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