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피를 뽑고 나면 나눠주는 빵과 우유를 먹기 위해 헌혈을 했다는 사람의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것도 '피와 맞바꾼 빵'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지난해 상연돼 호평을 받았던 극단 미추의 '허삼관 매혈기'(극본 배삼식·연출 강대홍·7월 4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02-문예진흥원 예술극장 소극장 02-747-5161)가 20년간 연극계 화제작을 엄선한 '연극열전'에 초청돼 다시 무대에 올랐다.
연극은 제목 그대로 허삼관이라는 인물의 매혈기, 즉 피를 팔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1950년대 중국, 젊은 공장노동자 허삼관은 돈을 모으기 위해 피를 판다. 그는 피를 판 돈으로 미모의 허옥란과 결혼하고 세 아들을 낳는다. 10여년 후, 큰아들 일락이 허옥란과 전 애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임을 알게 된 허삼관은 도무지 일락을 친자식들과 똑같이 대할 수가 없다.
가뭄과 문화혁명 등 고비 때마다 피를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던 허삼관은 중병에 걸린 일락의 병원비를 위해 닥치는 대로 피를 뽑아댄다. 쓰러져 정작 자신이 수혈받는 지경에 이르면서도 그는 다시 여러 곳에 피를 팔아 아들을 살려낸다.
허삼관이 피를 팔 때마다 무대 천장에서는 붉은 등이 하나씩 내려온다. 자신의 피로 먹이고 입혀가며 일락을 아들로 받아들여온 허삼관의 부정(父情)은 일락의 치료비를 대느라 붉은 등이 셀 수 없이 늘어가는 부분에서 절정에 오른다.
'피'는 곧 허삼관의 고난이고 희생이며 삶의 의미이자 버팀목이다. 연극의 줄거리는 작게 보면 핏줄이 중심이 된 가족사이지만 크게 보면 수많은 피를 흘려야했던 중국 현대사의 아픈 역사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인물들은 '피를 팔아야 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시종일관 웃음 속에서 풀어간다.
노인이 된 허삼관은 병원에서 자신의 피를 거부하자 흥분해 소리친다. "평생 남을 위해서만 피를 팔았어. 이제 이 허삼관이를 위해서 한번 팔아보겠다는데 왜 안된다는 거야?"
숨가쁘게 달려와 이제 겨우 자신을 돌볼 여유를 찾았는데 말이다. 인생이란 늘 이렇게 부모에게 인색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