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이 지났습니다. 들녘엔 아직 거두지 못한 벼들이 서리를 뒤집어쓰고 아침을 맞이합니다. 밭에는 잎채소를 보기 어렵습니다. 호박 줄기는 덜 여문 호박을 마르고 처진 잎 아래에 감추었고, 노랗게 끝이 마른 부추와 파도 보입니다. 채소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여름 내내 사납고 꺼실꺼실한 잎으로 다른 나무들을 친친 감고 살기등등하게 길섶을 메우던 환삼덩굴 잎이 된서리를 맞아 폭삭 주저앉아 있습니다.
외래종 특유의 사납고 질긴 생명력으로 미움을 받던 녀석의 풀죽은 모습을 보니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나무와 풀은 이제 여름철 자신을 태우던 뜨거운 생명력 넘치는 욕망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 자신을 갈무리 해야겠지요. 풀은 씨앗 속에 또 하나의 나를 담아 봄을 기다리고 나무는 미련 없이 묵은 잎을 떨어뜨려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청준 작가의 소설들은 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여러 모티프의 중첩으로 양파 껍질처럼 켜겨 있어, 늘 소설 속에 나오는 장치와 인물들의 행동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등단작 『퇴원』을 같이 공부하는 벗들과 읽었습니다. 위궤양, 뱀, 광, 전짓불, 거울, 시계, 오줌, 창문 이런 많은 은유들이 소설 속에 켜겨 쌓여 있습니다. 버터를 듬뿍 넣은 반죽으로 켜켜이 층을 내 초승달 모양으로 만든 프랑스의 페이스트 ‘크루아상’ 같습니다. 이청준의 소설 역시 이렇게 작가가 소설의 층층이 숨겨놓은 여러 가지 이면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숨은 그림 찾기처럼 즐겁습니다.
김은정* 에 의하면 아버지에 의해 행해진 것은 잘못된 욕망의 교화를 목적으로 한 감금(광)이었지만, 주체인 나에게 파악되는 ‘감금’의 의미는 애초에 없었던 욕망의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감금의 상태에서 형성된 ‘먹고 싶다’라는 욕망은 ‘끼니’라는 욕구로 채워지지 못하고, 그 채워지지 못한 공복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퇴원』에서 ‘위궤양’이라는 병명으로 구현된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는 각자 찾아낸 ‘은유’를 앞에 두고 주체의 어떤 모습이 반영되었는지를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좋은 작품 앞에 머리를 맞대고 벗들과 함께 이야기하였고 우리가 막히는 부분에서는 그 맥락을 짚어주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교실로 찬 기운을 몰고 오는 바람이 이따금 문틈으로 들어오고 창밖은 겨울의 정막과 어둠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따스한 가로등 불빛이 우리들을 부럽게 쳐다보는 책과 함께한 행복한 밤이었습니다.
겨울이 성큼 다가섭니다. 긴긴 밤, 이청준의 소설을 읽으며 그의 관념적 사유의 세계를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환절기입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김은정(2018), 질병의 의미를 중심으로 이청준의 <퇴원> 읽기, 우리말글 제77집을 참고함.
『퇴원』, 이청준 지음, 푸르메,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