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뉴질랜드(New Zealand)여야만 하는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몇가지 조건이 맞았을 뿐이다. 여행 시기가 12월 마지막 주부터 1월 첫째 주여서, 우리나라보다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시차가 4시간 이내여서 시차 적응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지도 위 우리나라에서 경선(經線)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남반구의 오세아니아 대륙이 나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일대는 아내가 여행을 가 봤다고 해서, 주변을 살펴보니 뉴질랜드가 눈에 띄었다. 마침 지리 교사인 나로서는 세계 지리 과목에서 자주 다루는 국가인 뉴질랜드를 실제로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과도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2016년의 연말과 2017년의 연시 2주 동안의 신혼여행지가 뉴질랜드로 결정됐다.
퀸스타운, 그리고 뉴질랜드의 상징 키위 인천 공항을 떠나 뉴질랜드 북섬의 오클랜드(Auckland)를 거쳐, 남섬(South Island)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도시는 퀸스타운(Queenstown)이었다. 퀸스타운은 서던알프스(Southern Alps)와 와카티푸(Wakatipu)호에 기대어 있는 아름다운 관광 도시이다. 인구 1만 5천여 명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볼거리, 즐길 거리가 다양해 남섬에서 가장 대표적인 관광 도시로 꼽힌다. 산과 호수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루지·트레킹·번지점프·스키 등 사계절 다양한 액티비티(activity)를 즐길 수 있다.
스카이라인 곤돌라를 타고 도시 뒤편 언덕에 오르면 퀸스타운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언덕 위 전망대에 서면, 이 도시의 입지를 말할 때 서던알프스와 와카티푸호를 언급한 이유를 알게 된다. 와카티푸호의 푸르른 물빛과 도시의 풍경이 어우러지고, 멀리로는 장엄한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몇 만년 전 빙하의 작용에 의해 급경사의 산지와 골짜기, 호수가 형성됐다는 점을 알고 보면 더 풍경이 아름다워 보인다. 겨울이면 산이 눈으로 뒤덮이고 그곳에서 스키도 탈 수 있다고 한다.
곤돌라 승강장 바로 옆에는 얼핏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퀸스타운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인 키위 생태 공원(kiwi birdlife park)이 있다. 키위는 날지 않는 모습으로 진화한, 뉴질랜드 생물의 대표적 상징이다. 하지만 키위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낮에 동물원에 찾아갔을 때는 보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이곳은 몇만 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서 키위와 인증샷 한 장도 찍지 못하는, ‘싱거운’ 동물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쥐, 고양이, 족제비 등의 유입 이후 멸종 위기에 내몰린 야생 키위를 보존하고, 고유 생태계 보존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하루에 4~5회 정도 키위 먹이를 주는 시간이 있으니, 홈페이지에서 미리 알아보고 그 시간에 맞춰서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키위 외에도 뉴질랜드 토종 야생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데, 뚱뚱한 뉴질랜드 비둘기 케레루(kereru)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자연 지형과 울창한 숲이 그대로 살아있는 공원 내부의 오솔길을 따라 여러 토종 동물들을 구경하다 보면, 마치 사람이 자연으로 초대받은 기분이 든다.
밀퍼드사운드, 그리고 서던알프스의 케아남섬의 남서부 일대는 몇만 년 전 빙하가 만들어낸 급경사의 산지와 깊은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차 형성된 피오르(fjord) 해안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남섬에서 피오르 해안의 장관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밀퍼드사운드(Milford Sound)이다. 여기서 ‘사운드’는 ‘소리’가 아니라, ‘좁은 바다’를 일컫는 말이다. 밀퍼드사운드는 개인 차량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퀸스타운, 테아나우(Te Anau)에서 출발하는 당일 투어 상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버스를 타고 서던알프스의 험준한 고갯길을 넘은 뒤 크루즈 선을 타고 피오르를 감상하게 된다.
퀸스타운보다 좀 더 밀퍼드사운드에 가까운 테아나우에서 투어 버스에 탑승했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으면서 기착지에서 라벤더 밭도 보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맑은 호수도 구경했다. 밀퍼드사운드에 도착해서 탑승한 크루즈 선은 협만(峽灣) 내부를 유유히 항해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를 흐르는 강처럼 좁고 길쭉한 바닷길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이곳이 바다임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바위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물개들도 보였다. 절벽에는 폭포 여러 개가 흘러내렸고, 크루즈 선이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바로 아래까지 들어갔다 나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만날 수 없는 자연의 조각가 빙하의 위대한 작품을 감상하니 감격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갯길 가운데 기착지에서 ‘케아(kea)’를 만났다. 케아는 뉴질랜드 고유의 앵무새인데, 보통의 앵무새와 다르게 산악 지대에만 서식한다. 신생대 이래로 조산운동에 의해 서던알프스가 형성됐고, 이로 인해 평지에 사는 앵무새에서 갈라져 나와 산악 지대에 적응한 앵무새가 바로 케아다. 그래서 다른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앵무새를 연상하면 안된다. 활동적이고 용감하게
서던알프스를 날아다니며, 호기심이 많아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진을 찍어도 꼼짝도 안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물끄러미 관찰하는 케아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한때 방목지에 들어와 양을 공격하는 등의 행동으로 해조(害鳥)로 규정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특이한 생태와 보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케아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안내 표지판을 보면서, 토종 야생 조류를 보호하고자 하는 뉴질랜드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크라이스트처치, 정원과 지진의 도시 캔터베리(Canterbury) 주의 주도인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는 남섬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가장 크다고 해도 인구가 30만 명 대로 우리 기준으로는 소도시에 불과하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정원의 도시’라는 별칭답게, 도시 내에 공원과 녹지가 곳곳에 있다. 도심을 가로질러 에이번(Avon)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고, 강둑에는 푸르른 잔디밭과 나무, 그리고 오리들이 있다. 답답한 도시 풍경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도심에 맞닿아 있는 노스 해글리 공원(North Hagley Park)은 서울의 올림픽 공원보다도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새소리가 지저귀는 공원에서 산책, 운동,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공원 안에서는 캔터베리 주의 자연 지리와 인문 지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캔터베리 박물관과, 그리고 잘 가꾸어진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는 크라이스트처치 식물원을 함께 방문하면 좋을 것이다.
에이번 강둑 공원의 한켠에는 영국연방 국가답게 엘리자베스 여왕, 쿡 선장 등의 동상이 있다. 그런데 한 동상은 기단부만 있고 위에 아무것도 없는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100여 년 전 영국인으로서 남극점에 도달하고자 탐험을 했던 로버트 스콧(Robert Falcon Scott)이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영국의 남극 탐험 전진 기지였고, 로버트 스콧의 탐험(비록 2번째로 남극을 발견했을지라도 용감한 영국인의 상징)을 기념해서 이곳에 동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11년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으로 인해 동상이 파손되고, 지진 박물관인 퀘이크시티(Quake City)에 동상을 옮겼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지난 2010년, 2011년 각각 규모 7.1, 6.3의 대지진을 연속적으로 겪어 큰 인명 및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도심 광장에 위치해 랜드마크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인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은 아직까지도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반쯤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판과 태평양 판이 만나는 경계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자연 지리는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포항, 경주 지진을 겪고도 아직도 안전 지괴(地塊)에 산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진 동상과 건물을 보면 지진의 무서움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곤 한다.
대지진을 겪은 도시 경관의 참상,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모습을 지진 박물관인 퀘이크 시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 로비에는 부서진 스콧 동상이 가로 놓여 있어서 지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시장에는 지진의 규모, 피해 양상 등에 대한 정보, 지진 피해를 입은 도시의 참상을 여러 전시물을 통해 볼 수 있다.
한편 도심에는 지진으로 삶터를 잃은 상인들의 시름을 달래고 재도약하고자 만든 임시 상가인 리스타트 몰(RE:START mall)이란 곳도 있다. 이름부터 ‘새롭게 시작하고자’ 만들었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지진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고자 다양한 원색으로 칠한 컨테이너 임시 건물이 모인 상가이다.
다행히도 스콧 동상을 비롯한 크라이스트 처치의 많은 건물들이 다시 복원됐다. 임시 건물이었던 리스타트 몰은 현재 폐업 상태다. 아마 이곳의 상점들이 새 건물로 이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2년 전 여행의 기억이 사라진 것 같아서 잠시 아쉬운 감정이 들었지만, 주민들이 지진의 참상을 극복하고 일상에 복귀한 것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에필로그 뉴질랜드는 크게 2개의 섬인 남섬과 북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정된 시공간 내에서 여행지를 선택하다 보니 남섬에서 대부분의 여행 일정을 보냈다. 하지만 2주일 동안의 여행 경험도 지면 관계상 모두 쓰지 못한 만큼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짧은 여행, 그리고 더 짧은 글에서 미처 보고 느낄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 다양한 문화 경관 및 경험할 것들이 뉴질랜드에 있다. 자신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 여행 정보를 찾고 일정을 구성한다면 누구나 만족스러운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