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만남은 어떠한 것일까? 단 몇 번의 만남으로 인생을 바꾸어 버린 만남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시절의 제자 황상과의 만남이 그러하다. 정민교수는 어느 논문에서 인용된 황상의 「삼근계」라는 짧은 문장을 만난 후 황상과 정약용의 관련 자료와 편지글 등을 찾아 정리한 책이『삶을 바꾼 만남』이다. 읽는 내내 가슴이 뻐근하도록 즐거웠다.
이름 없는 시골 아전의 아들이 멋진 스승과 만나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을 두드렸다. 따뜻하고도 엄한 제자와 평생 그의 가르침을 삼가 익히고 따른 제자 황상의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잃어버린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다산의 공부의 방법으로 ‘초서(抄書)’이다. 이것은 책의 중요 대목을 베껴 써가며 읽는 방식이다. 다산은 제자마다 방대한 초서를 모은 총서(叢書)를 하나씩 가지고 있게 하였다.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黃裳)은 일흔의 나이에도 공부를 쉬지 않고 베겨 쓰고 메모하고, 정리하였다. 평생 그렇게 베낀 책이 키를 넘었다고 한다. 헉 ~~~ 사람들이 “그 연세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하십니까?” 하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님은 이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보네셨네. 그 긴 세월 동안 날마다 저술에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도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리셨네. 어찌 관 두껑을 덮기 전에야 이 지성스러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평생 스승의 말씀을 따라 공부하고 또 공부한 제자 황상과 아전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상관없이 평생 벗으로 만남을 계속한 정약용의 아들 학연의 모습도 무척 감동적이었다. 유월의 푸른 산처럼 싱그럽고 길섶을 장식하는 인동꽃 내음처럼 향기로운 만남이다.
첫여름이 곁을 내어주는 유월에 읽은 한 권의 책은 잠시 공부를 쉬고 있는 내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황상의 고민과 나의 고민이 겹치고 다산의 말씀이 긴 세월을 건너 나에게로 왔다. 공부는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 그 말씀을 새겨본다.
책꽂이에서 정약용의 마음결을 따라 간 시 한 편을 찾아 읽었다. 정일근 시인의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이다. 당시 대학생이던 시인은 시위주동자로 수배를 당하여 거제에 숨어있었다. 이 때 다산의 유배생활과 자신의 처지를 연결시켜 아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시이다. 시인의 아름다운 시어 속에 정약용의 마음이 배어져 나온다. 우두봉을 건너 그리운 아들 학연의 소식을 기다리는 그 마음은 안타깝고 어둡고 깊다.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適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삶을 바꾼 만남』, 정민지음, 문학동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