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은 축제다. 붉은 단풍의 축제가 한창이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축제의 장은 즐거운 곳이다. 그런데 어떻게 즐기는 것이 자연이 만든 축제에 어울릴까? 여럿 중에 정신의 활력을 찾는 즐거움이 가장 클 것이다. 정신의 활력을 찾는 방법은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는 것이다.
산책하며 사색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연을 벗하며 함께 해왔다. 그런 사람들에게 산은 특별한 감흥과 경험을 주었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지리산에서 은거하며 사색을 한 조선 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의 말이다. 산과 벗하며 사람이 산과 닮아 간다.
단풍 축제에서 축제의 기획자는 자연, 산이다. 산이 축제의 장을 열었다. 그 축제의 장에 많은 사람이 모인다. 이들은 두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산책하며 사색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구경하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산책하는 사람은 산속에서 단풍과 함께 걸으며 산이 만든 축제의 의미를 읽고 생각한다. 축제를 만든 단풍도 자세히 보면 매우 다양하다. 단풍을 만드는 대표적인 활엽수인 참나무도 갈참나무, 굴참나무, 물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 등 우리나라에 19종이나 있다.
산책하는 사람은 이런 다양한 나무들이 만든 단풍을 보며 붉게 물든 의미를 읽고 생각한다. 반면, 구경하는 사람은 산 주변에서 산이 만든 축제의 의미를 읽고 생각하지 않으며 익숙한 놀 거리를 찾는다. 다양한 단풍은 그냥 하나의 붉은 색을 지닌 놀이의 ‘배경’일 뿐이다.
굳이 산에 가지 않아도 놀 수 있는 놀이를 즐긴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내가 여기 왔다’는 흔적을 남기는 데 열중한다. 산책하는 사람은 산과 벗하며 산의 축제를 즐기고, 구경하는 사람은 산을 배경으로 놀이를 즐긴다.
‘지리산 시인’이라 불리는 이원규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 중략 … ”
이 시에는 지리산의 의미를 읽고 사색하는 산책자의 시선이 돋보인다. 지리산에 오면 그냥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지나가는 구경꾼으로 오지 말고, 천왕봉 일출을 보고, 노고단 구름바다를 보고, 반야봉 저녁노을을 보고, 벽소령 달빛을 보고, 피아골의 단풍을 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에 담긴 시인의 시선을 따라 지리산을 산책하면 지리산은 나에게 정신의 활력과 함께 큰 의미를 준다. 그러면서 산이 만든 축제에서 산과 벗하며 정신의 자유를 느낀다.
최근 자연을 벗하며 산책을 할 수 있는 산책길이 많이 생겼다. 지리산 둘레길도 그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이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해 둘레길을 찾는다. 그런데 대부분 구경꾼으로 지나간다. 풍경 좋은 곳에서 사진 찍고 둘레길 코스 이정표에서 사진 찍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며 지나간다. 그들에게 산이 열어놓은 의미가 아니라 손에 들고 있는 기록물이 중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경꾼은 사진 기록물은 소유하지만, 산이 주는 의미로부터는 스스로 소외를 만든다.
가을, 축제가 많다. 산의 축제뿐만 아니라 도시의 축제도 많다. 교정에도 풍성한 ‘복정축전’이 열렸다. 축제의 장은 즐김의 공간이다. 단지 구경하는 사람보다 산책하는 사람의 즐거움이 크다. 산책하는 사람은 축제의 장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장면, 만나게 되는 사람과 함께 하며 축제의 다양한 모습에 동화되어 축제의 의미를 즐겁게 경험한다.
어떤 축제를 즐길까? 그것은 축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달려 있다. 축제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원규 시인의 다음 구절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