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문학과 철학이 분리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서구에서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잘 알려진 호메로스(Homeros), 최초로 교술(敎述)시를 썼던 헤시오도스(Hesiodos), 여류시인으로서 사랑의 감정을 노래했던 사포(Sappho) 등 여러 시인이 존재했다. 문학작품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말과 글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생각을 공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전승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해왔다.
기원전 8~9세기부터 내려온 고대 그리스의 문학작품들은 아테네의 전성기에는 희극과 비극의 형태로 변화하여 정례화되었다. 아테네에서는 매년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희극·비극 경연이 열렸으며 이 경연은 모든 아테네인이 직접 참여하고 활동하는 등 아테네의 일상 속 문화생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등은 모두 이 시기에 완성된 작품이다. 비극경연은 주로 3부작으로 구성되는 데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오이디푸스 왕>이다.
오만의 씨앗을 벗지 못했던 오이디푸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실제 오이디푸스 왕은 큰 관련은 없다. 프로이트의 설명과는 달리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려고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크레타를 떠났다가 우연히 자신의 친부 라이오스를 만났고, 삼거리에서 뒤로 물러설 수 없었던 그는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노인을 죽인다. 오늘날의 우리라면 길을 비켜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신들의 이름으로 정의된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 했지만, 명예로운 왕족의 자제라는 출신 배경에 자리 잡은 오만(hybris)의 씨앗은 벗지 못했다. 오만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신처럼 함부로 행동하는 자세를 뜻한다. 신들도 죄 없는 사람을 죽였을 때 그것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는다.
하물며 친부를 죽인 오이디푸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이오스의 오만은 신들의 뜻에 따라 심판받은 것이었다. 라이오스는 테바이 왕자 시절 피사(Pisa)에 망명하여 환대를 받았으나, 펠롭스 왕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강간하여 죽게 했다. 신들은 그에게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며 자식의 손에 죽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신의 경고를 무시했던 라이오스에게 삼거리에서의 대면은 그가 져야 할 업보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 복수가 친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리스 비극의 무서운 점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유명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찾는다. 테이레시아스는 시각을 잃은 맹인이지만 여느 사람보다도 더 무서운 통찰력과 지혜를 갖고 있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를 한편으로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경멸한다. 그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그의 남루한 옷차림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을 폄하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지혜로 얻은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테이레시아스를 겁박한다. 그가 크레온과 모의하여 오이디푸스를 끌어내리려는 반란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오만을 경고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저버리면 더 가혹하게 되받아치는 법이다.
오이디푸스가 삼거리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은 왕족과 영웅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지체 높은 그들에게는 늘 거리낌 없이 행동할 기회가 열려있다.
라이오스와 대면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든 모르든 굳이 사람을 죽여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사람을 죽인 아폴론이 수년 동안 제우스 또는 헤라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인간의 노예가 되어 봉사해야 하는 일들은 종종 있다. 그처럼 살인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으며 무사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살인을 저지른 오이디푸스의 본성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더 가혹한 방향으로 치닫는 ‘운명을 거역하려는 시도’
<오이디푸스 왕>의 왕은 티라노스(tyrannos). 난폭한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독재자라는 의미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제거하고 테바이 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왕좌에 올랐다. 그의 옆에는 영원히 미모를 유지하는 아내와 네 명의 자식들이 있었고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잔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테바이는 오염(miasma)이 되어 역병이 들고 신들의 버림을 받았다. 오염이란 신성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들이 알고 보면 가장 추악한 짓을 저질렀음을 뜻한다.
오이디푸스는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온 영웅처럼 보였지만, 시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어 왕좌에 오른 뜨내기 군주였다. 따라서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이익을 보장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해야 했다. 그가 자신의 외삼촌 크레온이 테이레시아스와 내통해 쿠데타를 일으킬 것으로 의심한 것은 지혜가 아닌 두려움에 의존하는 독재자였음을 고백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마키아벨리가 추구했던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군주’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더 가혹한 인물이었다.
테이레시아스는 망설이지 않는다. 진리(aletheia) 앞에서 어떠한 두려움도 없다(Oedipus Tyrannos, 369-370).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를 눈과 귀와 정신도 멀어버린 늙은이로 모욕한다. 하지만 그 격렬한 모욕은 내면의 두려움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반작용이다. 오이디푸스가 이 모든 것에 크레온의 사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테이레시아스의 지적처럼 오이디푸스 그 자체가 재앙일 뿐이다. 자신이 모든 잘못의 원인이면서 그 행위를 들추겠다는 것까지 어디 하나 오이디푸스의 손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운명을 거역하려는 시도가 더욱더 가혹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망각과 싸우는 인간, 교육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진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망각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뜻한다. 인간은 망각과 싸우는 존재이다. 때로는 기억은 어느 순간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다시 사라지게 된다. 인간은 전생에 했던 모든 일을 기억했지만, lethe의 강물을 마시게 되면서 더이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문명권 어디서나 공통된 이러한 비유는 인간 기억의 신비함을 보여준다.
현대 교육학은 인간 존재가 기억의 백지상태에서 경험을 통해 지식을 학습하게 되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과 경험의 복잡한 편린들은 참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단정 지을 수 없는 것들을 단정 지으려는 시도에 인간의 오만함이 숨어있다. 교육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어쩌면 교사가 학생들의 변화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얻으려는 태도조차 ‘나 혼자 열심히 노력하면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교육자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교육자의 역할이 ‘각성을 향한 계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학생들의 날 선 모습에 상처받는 오늘날 교사들의 이면에는 교육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정서가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눈뜬 자에서 장님이 되고
부자에서 거지가 되어 이국땅을 향해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가게 될 것이오
또 그는 자기 자식들의 형제이자
아버지로서 함께 살고 있으며
자신을 낳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고,
자기 아버지와 함께 씨 뿌린 자이자
그의 살해자임이 드러날 것이오
이오카스테는 불안해진다. 그동안 수면 아래 오랫동안 잠겨있던 기억이 강렬하게 뇌리를 스친다. 수십 년 전 라이오스에게 내려졌던 ‘자신이 낳은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소름 끼치는 예언, 라이오스의 아내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했던 자연스러운 운명은 이제 창끝이 되어 그를 겨누기 시작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들의 삶은 hamartia(빗맞음)을 조심해야 한다. 영웅들은 오디세우스의 화살이 그랬듯 백발백중으로 적들을 해치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영웅들의 무용은 어디까지나 신들의 가호 덕분이다.
오디세우스는 절친 멘토르(Mentor)로 둔갑한 아테나의 무용 덕분이었고, 오이디푸스를 테바이로 몰아넣은 그 과거 역시 신들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모습에 우리는 모두 좌절하고 극도의 절망감과 무기력에 빠져든다.
영웅의 몰락,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인간의 삶은 이성적이지 않고 납득하기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다.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결국 이성적이되 그 이성은 어디까지나 죽음 앞에 놓인 존재라는 엄밀한 자기인식을 요구하는 이성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혜는 가장 지혜로운 듯하나 그 지혜가 결국은 나를 가로막는다. 인간을 가로막는 것이 탐욕·오만·무지라면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와 오만이 결합하여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참혹한 패륜을 저지른 셈이다.
인간은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경제학의 10대 원칙에서도 인간은 합리적인 소비자임을 전제한다. 사실 인간이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주장 그 어디에도 근거는 없다. 인간은 가장 이성적 동물임을 주장하고, 동물과는 다른 지혜로움을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어디까지나 인간들과 동물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지혜일 뿐이다. 사실 인간은 매우 충동적이고 자기 이익에 민감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짐승만도 못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말과 판단의 예지는 어디까지나 매우 제한적인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오이디푸스는 지혜·부·명예·돈·권력·배우자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이 피하고 싶은 모든 재앙을 다 겪어야 할 불행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파멸하게 된 자신의 삶에 비탄하지만, 고통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오이디푸스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상황과 그의 마지막은 소포클레스의 또 다른 작품인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 등장한다.
비극은 영웅들의 몰락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간인 우리가 늘 겸손해야 함을 보여준다. 과거 원시사회에서 자신과 남을 구별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인식했던 인간은 고대사회에 접어들어 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자신을 뽐내려 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 인간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나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을 다잡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