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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과 손재형 이야기

500년 역사를 이어온 조선 왕조는 근대의 길목에서 쇠퇴의 길을 걷는다. 결국 치욕스러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고통에 발이 묶인다. 왕실 사람은 물론 사대부, 시골의 평범한 백성들까지 굴욕을 겪는다. 참혹함 속에서도 의연히 싸워 다행히 광복을 찾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우리 민족은 또 따른 시련을 만난다. 이념의 줄타기를 하다가 무모한 침략의 희생을 당한다. 동족 간의 전쟁이 남긴 상처는 오래갔고, 가난한 시대는 계속된다.

 

역사의 굴곡이 계속되면서 국민의 삶은 피폐해진다. 목숨을 보전하는 것조차 힘든데 민족정신인들 남아 있겠는가.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조상이 남긴 문화재는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을까.

 

손재형과 전형필은 문화재를 목숨처럼 지켰다. 그들은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식민지가 시작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전후로 해서 태어난다. 일제강점기에 공부하고, 탄압이 극심해져 우리말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아간다. 그야말로 암흑기에 젊음을 보낸다. 그들은 비참한 시대에 살면서도 정신의 힘은 잃지 않는다.

 

손재형은 한국 서예의 모습을 제시한 인물이다. 전통 서예의 맥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하여 한국 서예의 중심축을 이룬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서예(書藝)’라는 용어도 그의 제안으로 시작된다.

 

그는 추사(秋史)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집 이름도 ‘추사를 존중하는 집’이라는 의미로 ‘존추사실(尊秋史室)’이라 쓰기도 한다. 그가 추사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서예계 선배인 이한복의 영향이 크다. 이한복이 세상을 떠나자, 서예 연구 자료와 서화 골동들을 상당 부분 인수한다. 이후 서예 연구에 몰두하고, 고서화 수집에도 열을 올려 고미술 수장가가 된다. 그는 좋은 서화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역시 김정희에 관한 것이 많았다. 특히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歲寒圖)’는 자칫하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집념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지금 우리 곁에 있게 된다.

 

‘세한도’는 당시 재력가인 민영휘의 소유였는데,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츠카가 고가에 낙찰받은 것이다. 그는 김정희의 학문과 작품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학자였다. ‘세한도’도 학자로서 연구하다가 얻은 것이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갈 때 이 작품을 가지고 간다.

 

‘세한도’가 일본으로 간 사실을 알고 손재형은 후지츠카를 찾아 도쿄로 간다. 그는 작품을 돌려 달라고 부탁했지만, 후지츠카 역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손재형은 계속해서 그의 집을 찾는다. 결국 마음이 열린 후지츠카는 아들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작품을 손재형에게 양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재형은 계속해서 집을 찾는다. 후지츠카는 손재형의 마음이 단순한 사심이 아님을 알고 양도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대의 나라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는 말을 하며 넘겨준다. 이때 돈을 한 푼도 안 받았다고 한다. 국보 ‘세한도’는 이렇게 또 하나의 감동이 있는 이야기가 덧붙여지며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전형필 집안은 대지주다. 이 집안에서 23살에 상속자가 되고, 거부가 된다. 1932년 한남 서림 인수 이후 문화재 수집을 본격적으로 한다. 성북동 북단장을 매입하고 여기에 서화, 자기, 역사적 서적 등을 수장한다.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나중에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고침)을 세워 불도, 서화, 석불, 석탑, 등의 문화재를 관리한다.

 

그가 문화재를 지키는 길을 걷게 된 데는 주변 인물의 영향이 크다. 그는 이종사촌 형 박종화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가 휘문고보에 입학한 것도 형 때문이다. 또 여기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고희동을 만난다. 고희동은 스승으로 모시던 오세창에게 전형필을 데려간다. 오세창은 선각자 오경석의 아들로 추사 김정희의 직계 제자이며 금석학자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던 젊은 전형필에게는 모두 스승 같은 존재다.

 

그는 1940년 국문학자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 진본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태준의 제자인 이용준이 보관하고 있었다. 이용준의 선조가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세종대왕에게 《훈민정음》을 하사받아 가문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경성제대 도서관의 《세종실록》을 보고 훈민정음을 복원하기 시작했으며, 앞의 찢어진 두 장 또한 이용준의 글씨로 보완한다. 하지만, 김태준이 일제에 검거되면서 전형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지 못한다. 2년 뒤 김태준이 석방되자 노력 끝에 《훈민정음》 소유주를 찾는다. 《훈민정음》 소유주는 값으로 천 원을 부르지만, 전형필은 김태준에게 사례비 천 원을 주고 만 원이라는 가격에 사들인다. 당시 만 원은 집 한 채 가격이 넘는 거액이다. 전형필은 오동나무 상자 안에 《훈민정음》을 넣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한국전쟁의 위험을 넘긴다. 전형필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한글 창제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온갖 추측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세계의 학자들도 한글에 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손재형과 전형필은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고 문화재를 사들이고, 정작 자신에게는 이득이 없는 데도 이역만리까지 가서 우리 문화재를 찾아왔다. 이익에 밝고, 세속에 물든 사람들이 보면 그들은 바보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불행한 물질의 풍요 속에 살며 가치 없는 낭비를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의 풍파 속에 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나라도 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한낱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 자신만의 안정된 삶을 택하지 않고, 민족의 얼과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았다. 그것이 국가를 지키고 민족정신을 잇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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