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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나는 빌런이 될 거야

사진첩 가득 아이들
핸드폰 앨범에 들어가 보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경고알림이 뜬다. 이유는 용량부족. 128GB라는 나름 넉넉한 공간이 있음에도 지난 2년 동안은 늘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사진보다도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사진이 가득 담겨 있다. 반은 자의, 반은 타의에 의해서다. 


1년 반이라는 짧지 않았던(이제는 일반적인) 발령대기 시기를 보내고 2019년 9월에 발령을 명받았다. 다행히 수업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지만 재미있고,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해맑지만 부산스럽다. 사진은 나만 볼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의 찬란한 순간을 담아보려는 목적으로 찍게 됐다. 내 기대를 뛰어넘거나 벗어나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 모습을 일회성으로 날려버리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 용량위기가 생길 때 필요 없는 사진을 삭제하기 위해 제일 처음으로 올라가보지만, 그때마다 이제는 나를 잊었을 아이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쉽게 삭제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내내 쌓여가고만 있던 수업의 순간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적자(write)생존’의 중의적 의미를 가득 담아 구글 드라이브에 폴더를 만들어 사진도 정리하고, 한 주차 수업을 정리하는 용도로 교단일기 블로그도 시작하고, 교사용 인스타그램도 만들었다. 물론 지금은 손을 놓은 상태다. 하고 싶은 것, 하면 좋은 것은 많으나 아직 나에게는 무리다. 하루를 ‘온전하게’ ‘아이들과’ ‘의미 있게’ 보내는 것. 그것이 나의 최선이기 때문이다.

 

 

빨간색 운동화
지난 2020년 나는 발령 후 첫 담임을 맡게 되었다. 열정이 차고 넘쳤던 3월, 코로나19로 인해 개학 연기를 맞게 된다. 처음에는 ‘이러고 있어도 되나?’ 눈치가 보였다. 두 번째는 ‘나만 심심해?’ 몸이 쑤셨다. 세 번째는 ‘나의 청춘이여…’ 시간이 아까웠다. 다행스럽게도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대학시절 룸메이트였던 친구들이 내 옆에 있었다. 한 친구의 권유로 컵타를 소재로 한 유튜브 채널을 만들게 되었다. 함께 살던 방 번호를 따 ‘301room’ 으로 채널명을 정했다. 그런데 동아리와 학예회용으로 잘 활용해보려고 만든 채널에 지금은 약 5,700여 명의 구독자가 방문한다. 지난 한 해, 유튜브도 나도 생각지도 못한 길을 걷게 되었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대구지역 교사들이 ‘학교가자.com’이라는 자체 학습사이트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심을 담은 응원과 감사 메시지를 남겼다가 오히려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유튜브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고 합류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우리 채널을 제대로 보셨다면 그런 제안이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슬쩍 보신 게 분명했다. 덕분에(?) 방향성을 잃고 배회하던 열정이 뭐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학교가자’는 비대면으로 운영되었고, 화상회의와 구글 도구를 그때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그저 신기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역을 골라 파트분배가 이루어졌는데 나한테 있는 거라곤 당시 영상 3개 정도 보유하고 있던 유튜브 채널이었다.

 

컵타와 유일하게 연결 지을 수 있는 파트는 ‘오늘의 미션’밖에 없었다. 컵타를 일주일 동안 매일 학년별로 난이도를 달리하여 미션으로 제시해줬는데 생각지도 못한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랑과 관심에 힘 입어 학교현장에서 필요로 할 만한 콘텐츠를 정말 아무거나 다 제작했다. 살면서 이렇게 몰입해본 순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1년 동안 만든 콘텐츠를 세어보니 100개가 넘었다. 코끼리 코를 돌다가 바닥에 나자빠져 새로 산 빨간색 운동화가 화면 가득 빛나고 있던 그 순간 나는 ‘해피융쌤’이 되었다.

 

기회비용
요즘 글을 주기적으로 쓰고 있다. 아는 지인들이 모여 만든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완벽한 비대면 모임이다. 각 주차별 주제에 맞게 글을 쓰고, 서로 답글을 달며, 소통한다. 현재는 나만의 미니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저마다 다양한 주제로 기획연재 중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자기소개서’라는 가제로 한 번쯤 꿈꿔봤던 직업에 지원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매주 모두가 치를 떠는 자기소개서를 연재 중이다. 문득, 잠시 접어두었던 나의 지난 꿈들을 회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나의 꿈은 방송 쪽에 있었다. EBS에 입사하여 교육과 관련된 방송이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고 싶었는데 입시에 막혀 오히려 나에게 더 맞는 길을 찾았다. 하지만 이유 모를 갈증은 있다.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어느 샌가 잘 그려지지 않고, 사람이 직업에 점점 맞춰진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 다른 직종에 있는 친구들과 만나고 나면 이런 갈증이 더 심해진다. 다닌 지 1년도 안 된 거 같은 직장을 관두고 더 좋은 조건을 내세운 회사로 이직하는 친구, 반차를 내고 모처럼 아침에 여유를 즐긴다는 친구, 자신을 전면에 내세워 개성이 강한 유튜브 활동을 하는 친구까지. 학교 밖에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물론 상대적이고 순간적인 잣대임을 알기에, 내게 주어진 삶에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내 속 안에 어떤 잠재력이 아직 빛을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은 멈출 수 없다. 교사의 품위 훼손에 일조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느라 점점 소심해지고 작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더욱 그렇다. 비대면 글쓰기 모임을 시간 들여 굳이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 속에선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보고 나도 그 사람들이 신기하다. 같은 시간 속 서로 다른 삶을 함께 공유하다 보면 오히려 불안함이 잠재워지고 하나의 개체로서 인정받고 존중받는 느낌이다. 

 

내가 하는 일을 동사로 표현해본다면?
영화 <타임 투게더>에 아들이 아빠의 직업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빠의 직업은 ‘헤드헌터’인데, 아들은 아빠가 ‘다른 아빠들이 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 그래서 가족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동사’로 표현한다. 그 장면을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선생님, 교사라는 명사가 아닌 어떤 동사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내 주변 또래교사들은 보통 이 시기에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을 진학하는 친구들을 보며 관성을 느꼈다. 입시·임용고시·학위·승진…. 그다음은? 그리고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아직 대학원을 진학하지 않았다. 관심분야는 늘 있으나 그중 하나를 꼽아 진득하게 일과 병행하면서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모두 젊을 때, 결혼하기 전에 석사는 따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다. 지금은 아이들과 있는 시간을 최대로 늘리고 나만의 수업스타일과 학급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올해 세 가지를 실천 중이다. 


첫째, 교내 교육력제고팀에 합류했다. 현재 재직 중인 작은 학교엔 교육복지학생·탈북학생·기초학력대상 학생들이 많다. 작년 한 해 코로나19로 등교도 못 하고 학부모님의 도움도 받지 못하며 학습결손은 물론 마음의 고통이 깊어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시작됐다. 쉽게 끝나지 않을 팬데믹 상황 속에서 교사는 그저 누구나 해줄 수 있는 위로보다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해 소규모학교에 적용된 전면 등교를 십분 활용하여 회복탄력성 함양을 도와줄 프로그램을 열심히 개발하고 적용 중에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물론 나도 더욱 긍정적이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둘째, 서울시 에듀테크 선도교사단에 지원하여 활동 중이다. 원격수업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아이들의 저조한 참여율이었다. 카메라를 켜지 않는 것은 물론 누워서 수업에 임하는 학생도 있었다. 초등학생은 특히 원격수업을 수업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학교에 등교했을 때와 다름없는 실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수업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학교가자.com’을 함께 만들어간 선생님들께 상호작용 도구를 배우기도 하고 연수도 찾아서 들으면서 하나씩 수업에 시도해보았다. 새로운 형태의 수업에 재미를 느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기존 교육현장에 존재한 문제점과 한계점을 어디까지 보완해줄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고, 그렇게 선도교사단에 지원하게 되었다. 전면등교임에도 우리 반에선 블렌디드가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필요한 순간에만 적용한다. 태블릿보다는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경험을 주고 싶다. 


셋째, 아침독서시간에 교탁에서 신문을 펴놓고 읽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 내 옆에 앉아 함께 읽는 아이들이 몇 명 생겼다. 신문을 읽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신문은 지면이 커서 함께 읽는 게 가능하다. ‘이게 뭐에요?’라고 물어보면 열심히 설명해주는 편이고 ‘저도 이거 알아요!’라고 아는 척을 하면 함께 대화하려고 유도하는 편이다. 또 아이들에게 독서하라고 잔소리하는 것보단 교사가 교실 중앙에서 조용히 텍스트를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신문을 펴지 않았을 때보다 폈을 때가 확실히 아침 분위기가 차분하다. 그리고 신문에 있는 내용을 수업시간에 접목시킨다. 최근에는 신문을 활용하여 <수학>의 비율그래프, <사회>의 우리나라 경제발전, <실과>의 소프트웨어, <국어>의 논설문을 지도했다. 학교 밖의 사회와 아이들은 연결되어야 한다. 단순히 교과서대로 배우러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 속에 사회를 담을 줄 아는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 연결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매일 바쁘다.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하는 세상에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저마다의 길을 찾도록 기회를 열어주고 기다려주고 응원해줘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할 수 있도록 늘 아이들을 보고 있다. 지난주에는 학교 텃밭에서 아이들과 감자를 수확하는 활동을 했다. 출근 준비를 하며 목장갑·팔토시·모자를 챙겼고 점심시간에 맞춰 혼자 분주히 뛰어다니며 수확한 감자를 삶아서 아이들을 먹였다. 맛있게 잘 먹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하는 일은 이런 거다. 내가 하는 일은 결코 하나의 동사로 표현할 수가 없다.

 

요즘 <슬기로운 의사생활2>를 재밌게 보고 있다. 극중 한 인물이 ‘빌런’이라는 뜻을 ‘열심히 빌고 열심히 런(run)하며 일하는 사람’으로 잘못 알고 ‘최고의 빌런이 될 거야’라며 뿌듯하게 외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빌런은 악당 또는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평범한 사람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나는 이 두 가지 의미 모두 마음에 든다. 열심히 교직에 몸을 담아 전문성을 지닌 초등교사로 성장하고 싶고, 학생들로부터 ‘저 선생님 조금 특이한데?’라는 말을 듣고 사는 개성 있는 초등교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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