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슬로베니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인지도 모른다. 알프스 산자락 아래 자리한 인구 200백만의 이 자그마한 나라는 친절한 사람들만 살고 있다. 류블랴나·피란·마리보르…. 슬로베니아의 행복한 도시를 여행했다.
슬로베니아. 솔직히 조금 낯선 나라다. 유럽 동남부에 자리한 나라인데 옛날에는 유고 연방에 속했다.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슬라브족들이 살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발칸반도에 숨은 듯 자리 잡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11분의 1. 대략 1,000만㎢. 전라도 넓이와 비슷하다. 인구는 2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라가 워낙 작다보니 동서를 횡단해봐야 고작 3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슬로베니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다. 당시 6개 연방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에서 슬로베니아는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쌓은 부를 다른 연방국가와 평등하게 배분해야 하는 공산주의 체제에 슬로베니아는 반기를 들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결정했다. 지금도 국민소득이 2만 5,000달러를 넘어, 동유럽과 발칸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더 많다.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쓴 기자에게 슬로베니아를 설명하는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탄식한다.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이는 온당치 못한 국제적 무관심이다’라는 황당한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도시 류블랴나
슬로베니아를 찾는 여행자들은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발음하기가 약간 까다로운 이 도시는 한 나라의 수도라고하기에는 너무 작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하지만, 인구라고 해봐야 28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류블랴나 가운데 자리한 프레셰레노프 광장은 오스트리아·크로아티아·이탈리아 등지에서 오는 기차들이 정차하는 중앙역과 가깝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여행자들과 현지인들로 붐빈다. 프레셰렌이라는 이름은 슬로베니아의 국민 시인인 프레셰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선두주자였으며, 강렬한 문장으로 유명했던 시인이다. 그가 죽은 날인 2월 8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이날에는 전국적으로 그의 시를 읽는 낭송회·콘서트·연극 공연 등이 열린다고 하니 그에 대한 슬로베니아 국민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동상은 아득한 시선으로 어느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 시선이 닿는 지점에는 그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율리아 프리미츠의 집이 있다. 평생 사랑했지만 신분차이로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들을 위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라는 의미로 이렇게 동상을 배치했다고 한다.
광장 옆으로는 류블랴니차 강이 흐른다. 강 양 옆으로는 바로크 양식과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풍경은 평화롭고 여유롭기만 하다. 강 옆으로는 레스토랑·카페·서점 등이 늘어서 있다. 소란스럽지 않아 산책을 하듯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기 좋다. 강변을 따라 걷다보면 트리플교(Triple Bridge)가 나온다. 슬로베니아의 대표적인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가 설계한 것으로 류블랴나 엽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트리플교에서 용의 다리로 가는 강가에 류블랴나 중앙시장이 자리한다. 이른 아침 찾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만 오후에 가도 시장의 정취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활력과 생기로 시장은 떠들썩하다. 싱그러운 과일과 꽃, 채소와 치즈로 가득 찬 시장은 슬로베니아의 또 다른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류블랴나는 작은 도시라 길을 잃어도 조금만 걸으면 지나갔던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그러니 길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골목을 산책하는 다정해 보이는 부부와 수레 가득 꽃을 담아 팔고 있는 멋진 반백의 할아버지. 모퉁이 빵가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져 나온다. 슬로베니아어로 류블랴나는 ‘사랑스럽다’는 뜻이다.
류블랴나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는 류블랴나 성이다. 9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511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17세기 초에 재건됐다. 류블랴나 성은 류블랴나 시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동안 요새·감옥·병원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각종 전시회와 이벤트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류블라냐 사람들이 결혼식장으로 가장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에 오르면 장난감 도시 같은 류블랴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달력에서 오려낸 동화 같은 풍경
알프스는 유럽의 많은 나라가 공유하는 산이다. 알프스하면 스위스를 떠올리지만 사실 절반 이상을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다. 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도 지분을 갖고 있고 슬로베니아도 발을 걸치고 있다. 줄리안 알프스는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댄 북서부 산악지대다. 트리글라브 등 2,000m 이상 고봉이 줄줄이 이어있다. 유월까지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다.
블레드 호수는 ‘줄리안 알프스의 진주’라고 불리는 곳이다. 둘레 6km의 작은 호수이지만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 만들어졌다. 호수가 보여주는 풍경은 정말이지 그림 같다. 푸른 물비늘을 일으키며 햇살을 반사하는 호수와 그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그리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알프스 산맥은 방금 달력에서 오려낸 듯 한 풍경을 보여준다.
블레드 호수가 유명한 건 블레드 호수에 떠 있는 블레드섬 때문이다. 이 자그마한 섬은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섬으로 전통 나룻배 ‘플레타나’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블레드 호수엔 플레타나가 23척뿐이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시대 때부터 그랬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블레드 호수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고, 딱 23척의 배만 노를 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숫자가 200년 넘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뱃사공 일은 가업으로만 전해지고, 남자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호숫가 절벽 위에는 블레드의 상징인 블레드 성이 자리한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 위에 자리한 모습이 동화 속에나 나옴직하다. 마법에 걸려 잠에 빠진 공주가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이 성은 약 800년 이상 남부 티롤의 주교가 앉던 의자가 있던 성당이었다.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족의 여름 별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새콤달콤한 오렌지 와인
슬로베니아 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세계 최대 와인 생산국’ 이탈리아, ‘세계 최대 면적 포도밭’ 스페인, ‘전통의 와인 강자’ 프랑스, ‘리슬링의 황제’ 독일, ‘주정강화 와인의 대명사’ 포르투갈, ‘신대륙 와인의 제왕’ 미국, ‘와인의 발상지’ 조지아(그루지아), ‘황제들의 와인’ 몰도바 그리고 ‘와인 신대륙’ 칠레·호주·남아공 등등. 저마다 자기 나라 와인에 대한 찬란한 수식어를 붙이는데, 슬로베니아 와인도 이 리스트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오렌지 와인이다.
많은 이들이 오렌지로 만든 와인이라고 오해하지만 당연 포도로 만들었다. ‘제4의 와인’으로도 불린다. 몇 년 전 영국 와인저널 <디켄터>의 칼럼니스트 크리스 머서(Chris Mercer)가 자신의 칼럼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은 오렌지 와인일 것’이란 추측을 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레드 와인 양조 방식을 접목해 만들기 때문에 레드 와인의 풍부함과 화이트 와인의 상쾌함을 모두 갖고 있는 게 특징이다. 첫맛은 화이트, 끝맛은 레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도 슬로베니아에 있다. 드라바강(Drava River)을 중심으로 펼쳐진 마리보르는 슬로베니아 제2의 도시로, 생산되는 와인 중 90% 정도가 화이트 와인인, 그야말로 화이트 와인의 천국이다.
마리보르 사람들의 와인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한데, 그 자부심의 한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라 온 이 포도나무는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16세기에 지어진 올드 바인 하우스(The Old Vine House)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과거 성벽의 일부였던 올드 바인 하우스는 현재 와인 전시 및 테이스팅 룸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래된 포도나무와 함께 마리보르 와인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꼽힌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화내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가이드가 내게 슬로베니아식 치킨을 맛보여주기 위해 웨이터에게 십분 동안 치킨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웃으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으면 메뉴판을 던져놓고 나갔을 텐데 말이다.
김이듬 시인은 그의 책 <디어 슬로베니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 자유롭고 게으르게,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삶이라는 여행을 누려가야겠다.”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다보면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에 낙관과 사랑이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열렬함과 치열함이 아니라, 한낮의 따스한 햇볕과 한 줌의 시원한 바람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아닐까 하는 사실을 말이다.
☞ 여행정보 슬로베니아로 가는 직항은 없다. 독일의 뮌헨공항을 거쳐 아드리아에어(www.adria.si)를 이용하는 편이 가장 저렴하다. 블레드는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등 인근 국가에서 도착하고 출발하는 국제선 전용 기차역이 따로 있다. 자세한 정보는 유레일 홈페이지(www.EurailTravel.com/kr)를 참조하면 된다. 중부유럽과 발칸반도를 잇는 주요 열차도 류블랴나를 거쳐 간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비자는 필요 없다. 통용되는 화폐는 유로화이며,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블레드의 그랜드호텔 토플리체(www.hotel-toplice.com)는 유서 깊은 호텔이다.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이 빼어나다. 류블랴나의 센트럴호텔(www.centralhotel.si)은 기차역에서 가깝다. 시내 관광의 중심인 프레셰레노프 광장도 지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