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무더워지는 5월이다. 봄은 스치듯 지나갈 테고 에어컨 없이는 잠들기 힘든 한여름 열대야가 머지않았다. 실제로 한반도의 여름은 더 더워지고 있다. 작년 여름은 평년보다 0.5도 높았고 폭염과 열대야 일수도 크게 늘었다. 이번 호는 무더운 여름을 대비해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하는 보약이자, 새콤한 맛과 달콤한 향기는 물론 선홍 빛깔이 고운 여름 음료 생맥산(生脈散)을 소개한다.
10년간 꾸준히 증가한 급성질환이 있는데, 바로 온열질환이다. 열과 빛의 영향으로 발생해 6~8월에 환자가 집중된다. 온열질환 중 가장 흔한 것이 일사병으로 외부 기온이 너무 높아 땀을 많이 흘린 상태에서 수분과 염분이 적절히 공급되지 못해 발생한다. 일사병에 걸리면 무기력감과 피로, 어지럼증, 메스꺼움, 구토 증상을 동반한다. 일사병은 실내·외를 구분하지 않고 더운 여름날 에어컨 없는 실내에서, 혹은 그늘 없는 땡볕에서 시간을 보낸 후에 누구나 경험하는 증상이다. 실외 일사병은 건강한 중년층에서 많이 나타나고, 실내 일사병은 고혈압, 당뇨병, 뇌졸중, 심혈관질환 병력이 있는 노년층에서 빈발한다. 생활습관병(성인병)이 있는 기저질환자는 나이, 장소에 구분 없이 더욱 취약하다.
조선왕이 에어컨 없이 여름 나는 비법
생맥산은 800여 년 전, 보중익기탕으로도 유명한 중국의 의사, 이고(李杲) 선생이 만든 처방으로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에 최초로 기록됐다. 이고 선생이 활동했던 금나라에서는 계속된 전란으로 주민들이 고난을 겪었고 수많은 질병이 발생했다. 뿐만아니라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지역의 기후 특징으로 여름은 길고 후덥지근하며 비가 잦았는데, 오늘날 한국의 여름보다 더 더워 일사병과 같은 온열질환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에어컨은커녕 냉장고나 선풍기도 없었으니 그 질고를 헤아리기 힘들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고 선생은 원기를 보하고 맥을 살리는 생맥산이라는 처방을 만들어 여러 백성을 구호했다.
조선왕실도 생맥산의 효능을 알아 왕들이 차처럼 즐겨 마셨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각각 20번, 871번 등장한다. 효종 4년 승정원일기에는 “생맥산은 하절다음(夏節茶飮) 불구첩수지약(不拘貼數之藥)”이라는 기록이 있다. “생맥산은 여름에 차로 마시는데, 음용 횟수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 마신다”라는 뜻이다. 선조 29년 실록에서는 선조가 임진왜란 중 고생하는 정3품 황신에게 여름 옷감, 은자 등과 함께 생맥산을 하사하는 내용도 살펴볼 수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생맥주는 잠시 안녕
우리 몸은 더운 환경에서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체온을 조절한다. 첫째, 심혈관계를 조절해 심장의 맥박을 빠르게 하고 심박출량을 늘려 피부 표면에 순환하는 혈액량을 증가시킨다. 둘째, 기초대사를 줄여 체열 발생을 감소시키기 위해 식욕중추에서 식욕을 억제시킨다. 셋째, 땀을 내 증발열을 통해 체열을 방출한다. 일사병을 포함하는 온열질환은 외부의 과도한 열로 체온조절에 과부하가 걸려 생긴다. 심장이 지쳐 빈맥이 나타나고 무기력감, 피로, 어지럼증, 식욕부진, 메스꺼움, 구토, 갈증, 입이 마르고 숨이 차는 증상이 그 결과다.
일사병 응급조치 방법의 핵심은 휴식과 충분한 수분 보충이다. 그러나 땀을 많이 흘렸을 경우, 과당 함량이 높은 이온 음료를 섭취하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또 여름이면 즐겨 찾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시원한 맥주는 이뇨 작용을 촉진해 탈수를 유발할 수 있어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 알코올은 체온을 상승시켜 일사병 증상을 악화시키면서 증상 자각을 어렵게 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실제로 매년 폭염에 음주 후 사망하는 사례가 보고되기도 한다.
심장에 에너지 더하고, 폐는 촉촉하게
생맥산은 인삼, 맥문동, 오미자가 각각 1:2:1의 비율로 구성된 단순한 처방이다. 오늘날에는 하절기의 전신권태, 목마름, 땀 과다에 효능·효과를 인정받아 의사와 한의사의 처방 없이 일반의약품으로도 복용 가능하다. 생맥산의 효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몸에 열이 쌓이고 땀을 많이 흘려 기(氣)와 진액(津液) 모두 손상됐을 때, 원기를 채워주고 진액은 더해준다. 또 생맥산은 심장근에 대한 보호작용과 같은 심기능 및 뇌혈류 개선 효과가 보고됐으며 인삼, 오미자, 맥문동 각각이 심혈관계 보호 작용을 한다. 이러한 효능으로 중국에서는 생맥산을 관상동맥 질병에 주로 처방하기도 한다. 따라서 생맥산은 심혈관질환이 있는 기저질환자의 여름 더위에 적극 추천할 만하다.
둘째, 생맥산은 폐의 기와 진액이 모두 손상돼 입이 마르고 혀가 건조하며 맥이 허할 때, 폐의 열을 꺼주고 진액을 생성한다. 적절한 체온 조절은 피부의 발한작용뿐만 아니라 폐호흡을 통해서도 이뤄지는데, 폐는 산소교환 기능을 겸하므로, 정상적인 에너지 대사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폐포 속 공기는 수증기로 포화돼 있으며 산소는 혈액 속에 녹아 전신에 공급된다. 그런데, 체온을 낮추기 위해 심박출량이 늘어나고 폐가 과호흡을 하게 되면, 폐포 모세혈관이 손상되고 산소공급이 부족해져 피로감, 어지러움, 실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맥문동은 기관지 점액 분비와 기관지 섬모운동을 촉진하고 면역세포 균형을 조절해 기도의 염증을 억제하는 등 호흡기계에 대한 작용이 뛰어나다. 오미자는 예로부터 기침과 천식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였는데, 실제 폐 세포의 각종 염증성 사이토카인을 낮춰 손상을 막고 기도염을 억제한다. 맥문동과 오미자는 이런 효능으로 호흡기가 약한 어린이와 고령자의 기관지염과 천식에 널리 쓰이므로 남녀노소가 생맥산으로 더위에 지친 폐를 촉촉하게 식힐 수 있다.
인삼의 열을 꺼주는 신기한 배합 비율
인삼은 보약 중 보약으로 유명하지만 따뜻한 성질이 있어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복용을 꺼리기도 한다. 그러나 생맥산은 약재 블렌딩을 통해 인삼의 원기회복 효능은 지키고 열에 지친 몸을 회복시킨다. 전통적으로는 찬 성질의 맥문동이 인삼의 따뜻한 성질과 조화를 이룬다.
오늘날, 여러 연구를 통해 생맥산 배합 비율의 비밀이 밝혀지고 있다. 오미자는 산도 조절제로 작용해 인삼 성분의 추출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오미자는 각종 유기산을 함유하고 있어 신맛이 특징이며 실제로 pH3~4로 산도가 높다. 오미자는 인삼 복용 후 열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인삼사포닌의 추출률을 크게 감소시킨다. 특히, 인삼 사포닌 중 진세노사이드 Rb1(ginsenoside Rb1)의 반감기는 58시간으로 길어 개인의 대사·배설 능력의 차이에 따라 인삼 복용 후 두통이나 상열감을 겪는 경우가 있는데, 오미자를 배합하면 진세노사이드 Rb1의 추출률이 반 이하로 감소하므로 인삼의 체질 장벽을 크게 낮춘다.
오미자는 인삼의 복합 탄수화물 중 혈당 저하, 면역조절 효과가 강한 파낙산(panaxan)과 같은 비사포닌 계열의 산성 약효 성분의 추출률을 증가시킨다. 이는 인삼과 오미자의 배합 비율이 1:1일 때 가장 뛰어나므로, 생맥산의 약재 구성 비율이 실로 놀랍다고 할 수 있다. 또 맥문동은 비율 2로 배합될 때, 혈당강하 효과가 좋은 복합다당이 가장 많이 추출된다. 따라서 체질에 따라 인삼 복용 후의 열감이 걱정되고 심혈관질환 및 성인병과 같은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인삼, 맥문동, 오미자의 배합 비율을 1:2:1로 맞춰 달여 생맥산의 신통한 효과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인삼, 오미자, 맥문동은 모두 식품으로 유통되므로 시장이나 마트,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식품의 경우 유효성분의 함량 규정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보다 안전하고 유효한 생맥산을 달이고 싶다면 가까운 한방 약국을 방문해 정품 한약재를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예를 들어 오미자는 과육의 성숙과 채취 시기에 따라 유효성분이 크게 달라지므로 약용 규격품 오미자를 사용해야 생맥산의 효과를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김성용 대한한약사회 학술위원장
생맥산 달이는 법
재료(10회분 기준): 인삼 12g, 맥문동 24g, 오미자 12g, 물 1.2L, 필요시 거름망
조리 순서
① 인삼, 맥문동, 오미자를 준비해 흐르는 물에 간단히 세척한다.
② 세척한 재료를 물 1.2L에 넣고 강한 불로 먼저 짧게 끓인 뒤, 바로 약한 불로 줄여 달인다. 1시간 정도 약한 불로 달여 1L 정도가 되게 졸여준다.
③ 달인 물을 식힌 후 냉장 보관한다. 하루 2~3회 100mL씩 나눠 복용한다. 땀을 흘리고 더위를 탄 후에는 차갑게 복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