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새 정부의 출범으로 한국계 입양아 출신 플뢰르 펠르랭(39)이 사회당 정부의 중소기업, 혁신, 디지털 경제 분야의 각료가 됐다고 해서 최근 언론에서 화제다. 그녀는 출생은 한국에서 했지만 우리 나라가 그녀를 키우지 못해 서울의 거리에 버려져 있었다. 서울에서 한국인 부모의 딸로 태어난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프랑스로 입양된 것이다. 그후 그 이름조차도 전혀 기억도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그녀가 성공했다고 뿌리를 앞세워 언론이 앞장 서서 대서 특필하는 것은 솔직히 부끄럽기도 하다. 단순히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한국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아닐런지! 더욱이 그는 자신의 입으로 뼛속까지 프랑스 사람이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혈통을 중시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자란 곳을 의미있게 생각하는 문화이다. 곧 어떤 사회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펠르랭은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제 나이보다 2년 앞서 16세에 합격했고, 최고 수재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그랑제콜을 세 군데나 다녔다. 이 사실을 강조해 보도하는 배경에는 핏줄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은 종족주의적 우월감을 앞세우는 것이라 느껴
많은 사람들이 축구, 야구 등 대중적인 스포츠에 열광한다. 이 열광 속에서 우리가 읽어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스포츠는학교보다도 더 좋은 학습모델을 제공해 주고 있다. 선수들은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육상선수라면 100미터 경주에서 9초의 벽을 깨고 싶어한다. 모든 운동선수들은 어떤 수준의 능력을 가졌건 꿈을 갖고 있다. 그꿈은 상대적 게임이라면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고 기록 경기라면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경기에는 반드시 규칙이 존재하며 이 규칙을 어기면 손해를 보게 된다. 우리가 스포츠에 대하여 재미를 못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규칙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포츠를 즐기려면 규칙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모든 스포츠는 기술이 필요하다. 몸집이 크다고 힘을 과시하면서 으시대는 자세는 통하지 않는다. 유치원에서 초등학생 시절에나 통하는 것이다. 때문에 초등학교때 몸집이 큰 아이가 교실을 휘젓고 다니지만 조금 더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러한 힘이 발휘를 못하게 되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스포츠 세계는 몸으로 때우는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기술, 코트를 이용하
매년 이 나라 청소년의 건강과 스포츠 기량 향상을 위하여 전국소년체전이 개최된다. 이번 대회는 41회 대회로 경기도 일원의 주요 경기장에서 열려 시합을 관전하는 기회를 가졌다. 필자가 근무하는 광양여중은 여자 중학부 정구 선수가 출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시합이 전개되었다. 이때 필자는 선수들을 의자에 앉게 히고, 코치가 낮은 자세로 주문사항을 전달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코치는 선수의 눈높이보다 더 낮은 자세로 앉아 학생에게 친근하게 접근하는 장면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본교는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지만,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도자들이, 정치는 물론 스포츠 지도, 각분야의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 한 번 되새겨볼 만한 일이라 생각되는 명장면이 아닌가?
은석아! 푸른 5월 모든 자연에 생명력이 넘치는구나. 그간 학교생활은 잘 하고 있지? 어느새 1년을 훌쩍 넘기고 2학년이 되어 중간고사도 보았겠지. 지금 네 학교생활은 만족하고 있는지 교장선생님은 궁금하구나. 네가 학교를 졸업하면서 선생님들의 바른말 사용과 올바른 처벌 방법을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이제 우리 학교는 무지개학교 운영 2년째를 맞이하여 많은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단다. 가끔 네 모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렴! 선생님들도 배우고 학생도 배우고. 이것이 우리 학교 특징이야. 그래서 올 해는 교훈도 ‘배움에서 나를 찾자’라고 변경하였단다. 넌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고 하였었지? 인생의 시간은 유한하기에 모든 것을 다 하기는 어렵고, 그래도 잘 하려면 먼저 시간을 지배해야 인생을 지배한다는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만약 누군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거나 보증을 서 달라면 분명 주저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너에게 어디로 놀러가자고 하면 아마도 흔쾌히 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이를 두고 “사람은 시간을 빌려 주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만일 사람들이 돈을 아끼듯이 시간을 아낄 줄 알면 그 사람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스승의 권위가 약화되고, 교원의가치가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황이 되어 가고있는데 이는 매우 염려스러운 변화라 생각된다. 한마디로 교사 수난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날을 맞이하여 의미있게 보내기 위하여 교육공동체의 한 축인 학부모들의 교육에 관한 관심 제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필자가 근무하는 본교에서는1학급당 1명씩 27명의 학부모가 참여하는 ‘학부모 교육기부 1일 체험활동’을 하였다. 수업 주제는 인성교육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꿈과 희망 키우기, 다양한 직업 소개,지역의 문화 유산, 태권도 수업, 경찰이학부모인 경우청소년 성폭력 예방, 부모와의 대화 기술 등 다양한 강의 주제로 학부모와 학생들의 소통과 나눔이 함께하는 유익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사전에 주제를 정하여 수업의 충실을 기하도록 소통한 보람으로 학생과의 공감대를 이루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3학년 이정아 학생은 강의 소감으로 '엄마가 중요해'라는 말씀을 여러번 강조하였기에 미래에 언젠가는 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될텐데, 나도 지금부터 미래의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해서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려해야 하겠다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영화를 보면서 인생살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배우는 재미가 솔솔하다. 상당히 오래전에 나온영화인데 '주유소 습격사건'이란 영화가 있다. 이는주유소를 습격한 4인방이 펼치는 하룻밤 이야기이다. 돈만 밝히는 코치가 싫어 운동을 그만둔 야구선수 출신의 '노마크', 밥 먹을 때도 음악을 들어야 소화가 되는 어설픈 락커 '딴따라', 전위적인 누드를 즐겨 그리다 자기 인생의 밑그림도 못그려 놓은 화가 '뻬인트',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여학생의 짐을 들어줘도 강도로 오인받는 '무대포'의 등장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무대포가 싸움을 할 때 여러 명이 달려들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이 대답이 주는 의미가 마음에 남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한 놈만 패!" 라는 것이다. 천리길도 한걸음에서 시작되듯이, 목적 달성을 위해 시작은 모두가 아닌 한 놈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레이저와 돋보기의 원리를 이용하여 대화를 이끌어 간다. 레이저와 돋보기의 공통점은 빛을 한 곳으로 응집시카는 역할을 하기때문이다. 이렇게 응집된 빛은 철판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레이저 사고'(또는 돋보기 사고)이다. 요즘 아이들의 성향을 보면 끈질기
푸르는 녹음과 함께 5월의 햇살이 투명하게 내리쬐고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광양여중에서는 5월 15일 제 31회 스승의 날을 맞아 배움의 공동체 실현을 위한 행복의 약속 선언을 하였다. ‘즐겁게 배우고 꿈을 가꾸며 함께 성장하는 행복한 광양여중’을 만들기 위해 학생과 선생님들의 뜻을 모아 각각 10개 항의 공동의 약속을 만들어 선포하였다. 이번 선언은 지난 겨울방학 중 2012학년도 학교교육과정 편성을 위한 TF팀에서 약속 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이후 ‘행복의 약속 제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교사 학생 설문조사와 학급 토론회 및 학생 대토론회를 통해 보완했으며 뜻깊은 스승의 날을 맞아 발표를 하였다. 선언문은 학생대표 정혜영 학생회장이 먼저 낭독한 후 교사대표 김영훈 교감선생님께서 이어 낭독하셨다. 학생 선언문은 자신의 꿈을 갖고 선생님과 친구를 존중하며 수업시간에 경청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동을 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교사 선언문은 수업준비를 잘하고 학생의 말을 경청하며 학생의 자질을 발견하고 이끌어 주는 내용과 함께 학생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고 차별이나 체벌하지 않는 다짐의 표현이 담겨 있다. 학생의 약속 내용 자신을 소중하게 여
요즘 아이들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이다. 그래서 거침없이 '좋다, 싫다'를 말로 표현한다. 그래서 학교 수업 과목이나 가르치는 선생님도 좋다, 싫다를 이야기 하는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의무교육 단계인 중학교 과정에서 가르쳐야 할 과목을 좋아한다면 다행이지만 싫다고 공부를 안 한다면 어떻게 대처하여야 될까?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요구되고 있다. 학력면에서 국가가 정한 최소한도 기초학력 수준 이상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교육과정을 정하고 이를 학교에서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떤 과목을 싫다고 해서 교사가 이를 포기하는 것은 가르치는 의미를 잘 못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관계, 세일즈, 교육 등 어떤 분야에서건 설득의 달인들은 언제나 "NO"라는 답을 예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한 다음,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육의 어려움은 수준 차이가 있는 아이들이 있을 때, 한명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이끌어 가는 일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말만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가르치지 않고는 설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교사에게는 지식 분야의 전문성보다는 아이들이
수업은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요즈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소통이 어려워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왜 어려워졌는가? 시대가 급변하면서 교사의 권위가 약화된데 기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지식 측면에서 학부모의 평균 지식수준보다 교사의 지식 수준이 높았었다. 그리고 IT 기술 등 아이들이 더 빨리 세상을 이해하는데 교사만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교육과정 내용이 시대의 변화를 앞서지 못하고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기에 아이들은 수업에서 더 멀어져 가는 경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지금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너무나 많은 학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들을 단지 교실 속의 교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아이들은 시험을 치르면 좋은 점수를 얻기 기대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기대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절망이 따른다. 이때 교사의 "그래 넌 잘 할수 있어, 수업시간에 집중하면 다음에는 잘 할수 있을거야!"라는 따뜻한 한마디는 학생에게 어려움에 처한 장수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될 것이다. 필자가 가르친 한 학생은 교사의 용기를 북돋
학교는 한마디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곳이다. 이 교육과정을 조금 세분하여 보면 그 중심에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할 교과목이자리잡고 있다. 학생들에게 이 교과는 개인의 특성에 따라 그리고 교사를 통한 학습경험을 통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중학교부터는 모든 과목을 교과별로 전담 교사가 담당하게 되므로 교과와 학생과의 관계성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 그런데 사회라는 교과는 일반적으로 입시에서 최상의 중요도를 가진 과목이 아니기에 중학교 과정에서 잘 못 접근하면 암기과목으로만 생각하여 외우기를 싫어하는 학생에게는 멀어져 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중심에서 교사가 교과목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아이들의 반응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14년 전 내가 가르쳤던 S학생은 아래와 같은 반응을 글로 적고 있다. "사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사회과목을 못했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와서 김광섭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난 뒤부터는 사회 성적이 많이 좋아졌다. 1학년 때 한번 시험을 못 봐서 매일 매일 공부를 해서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것을 쓰고 외우고 할 때는 선생님이 밉고 정말로 싫었지만, 그렇게 공부한 뒤 본 시험에서 성적이 많이 올
우리 자녀는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나야할 존재이다. 사실 떠나보낸다는 것은 자녀가 혼자 독립할 때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부모가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우리 부모들은 자녀가 홀로 서야한다는 것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권인 일본,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의미를 가진 히키코모리가 있다. 이들은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 취직도, 결혼도 마다하고 사회와 연을 끊고 집에만 틀어 박혀 사는 일본의 젊은이들로, 약 300만 명이 넘는 숫자이다. 이러한 문제는 일본의 장래와도 연결될 것이다. 중국에서도 엄격한 산아제한 정책으로 한 가정에서 한 자녀만 낳다보니 이들에게 지나친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어 소황제처럼 자라나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학자 루소는 그의 저서 에밀에서 ‘자식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라고 말한바 있다. 자녀가 먼 훗날 멀리 비상하길 바란다면, 지금부터 그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살
교육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교육의 목표로 전인교육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몇몇 대학의 진학 결과를 학교교육의 성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진로교육만큼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와 갈등이 많은 교육정책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다시 진로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러나 이보다 더 강조해야 할 사람은 직접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닐까? 왜냐하면 20, 30년 후에 그 책임을 묻는다면 정부일 수도 있지만 직접 가르쳐 준 사람이 아닐까? 이는 질병 치료를 잘 못햇을 경우 병원장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를 비난하는 것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직접 가르치는 자의 책임은 막중하다 할 것이다. 지금 우리 학생들은 학교에서 매우 행복하지 못하다는 통계가 연일 나오고 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학업 때문에라는 항목이 선두를 가고 있다. 그 증거로 해마다 130여 명의 학생들이 자살하고 있으며 33만 명의 고위기 학생이 보살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 성적은 세계 최고임에도 학습 동기나 흥미 수준은 OECD 평균 이하라면 깊이 고민해야 할 상황이다. 이처럼 난마와 같이 얽힌 우리 교
우리의 정치는 지금 어디 와 있는가. 민주주의는 이미 타락해 포퓰리즘 늪에 빠져 있다. 정치인들은 누구도 미래를 말하고 있지 않다. 표를 의식하여 현재의 달콤함과 편리함만을 부추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부정한 방법으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진출하려는 사람들도 우리의 심정을 매우 허탈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하여 무관심이 심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제는 어떤가? 가진 자는 더 탐욕을 부리고, 없는 자는 시기와 질투에 매여 있다. 윤리는 어떤가? 이 나라에서 정중함과 예의 바름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저속함과 뻔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반듯한 사람은 왕따가 되고 삐딱하게 꼬인 인간은 박수를 받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정신으로 건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가? 역사에서 그런 예는 없다. 로마의 몰락은 로마 시민의 타락에서, 유럽의 쇠퇴는 이성을 따라가던 유럽 정신의 쇠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른들이 밭에 일하러 간 사이에 동네 아이들은 요술피리 소리에 홀려 그들을 쫓아 갔다. 우리 기성세대가 물질의 풍요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간 사이에 우리 아이들의 영혼은 엉뚱한 사람들이 빼앗아 갔다. 피리 소리에
일본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예전에는 ‘가깝고도 먼 나라’로 수식되었다. 그러던 일본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지리적으로 가깝고, 정서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의 한류 가수 이름이 일본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문화의 교류가 확장되고 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변화라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에게 숙명적인 이웃이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래, 만화·영화·드라마·음악 등 일본의 다양한 문화 콘텐트가 젊은이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한국에 스며들었다. 이제 한국에서도 케이블 TV에서 일본 드라마를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인터넷에서도 일본 후지TV의 애니메이션을 실시간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일본 문화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젊은이들이 주로 모이는 홍익대,·이태원 등지에는 종업원들이 “이랏샤이마세~”라고 인사하는 라면집과 일식주점에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도 몰라보게 돌려 놓고 있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44.3%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2008년에 비해 22.3%
미래의 직업환경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삶의 방식은 새로운 변화에 따른 도적에 직면하고 있다.과거 산업사회는 한두 명 똑똑한 사람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 조직을 이끌어 갔다. 하지만 고도의 지식 정보화 시대인 지금은 연결망를 형성한 직업 생태계의 상호 협력과 소통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성과를 창출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이다. 모바일 인터넷- 포스트 PC 시대가 이를 더욱 촉진하고 있다. 개인의 전문성이 아무리 뛰어난 인재일지라도 더불어 일하면서 살아갈 사람이 없다면 가진 전문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띠리서 서비스나 산업이 컨버전스된다고 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21세기 삶의 방식은 어느 분야에 전문성을 갖춰 하나만 잘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을 섞거나 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지식통합형 인재, 어떤 분야의 전문성은 물론, 타 분야의 경험 혹은 지식도 갖춘 컨버전스형 인재가 필요한 시대이다. 이같은 시대에서 생존의 필수 요소인 경쟁력이 요구된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협력이라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런 협력을 이끌어 내는 힘이 바로 인성이다. 교육분야에도 이같은 현상은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