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의 모든 여인을 이르는 말인데, 크게 상궁과 나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삼국 시대나 통일 신라 시대에는 궁녀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3000궁녀를 거느렸다는 기록이 있다. 문헌에 나타난 궁녀에 대한 기록은 고려 시대 제2대 왕 혜종 때부터이다. 궁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 것은 조선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여자 노비나 기생의 딸을 궁녀로 많이 뽑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궁녀를 뽑는 것이 매우 신중해져, 신분이 너무 천하지 않으면서 조상 중에 반역자가 없는 집안에서 궁녀를 뽑았다. 집안의 배경이 좋아야 할 뿐 아니라, 벼슬이 있는 사람의 추천이 있거나 상궁들의 추천을 받아야 궁녀에 뽑히기가 쉬웠다고 한다. 궁녀는 대개 4~5세에 뽑는데, 한 번 궁녀가 되면 궁궐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살아야 했다. 일단 궁녀로 뽑히면 사가(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살던 집)에서의 모든 일을 잊으라는 뜻으로 왕이 직접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래서 궁녀들은 일청(一淸), 경운(景雲), 소선(素仙) 등 옛 여성답지 않게 멋들어진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이러한 풍습이 사회에 퍼져 기생들
오늘날은 전화, 특히 휴대폰으로 소식을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주로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군대를 가거나 멀리 당신들의 품을 떠난 자식들에게 소식이 궁금할 때, “기별이 왔느냐?”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 신문이 발간된 것은 1883년에 박문국에서 나온 ‘한성순보’가 그 시작이다. ‘한성순보’는 순간(旬刊), 즉 10일에 한 번 발간되는 신문으로 국가에서 발행하는 관보(官報)였다. 관보는 헌법개정을 비롯하여 각종 법령·고시·예산·조약·서임·사령·국회사항·관청사항 등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써서 발행되는 신문이다. 한성순보는 처음에 한글과 한문을 함께 쓰는 국한문체로 발간하기로 계획했으나, 보수파(수구파)의 반대로 한문으로만 쓰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일간지는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다. 1896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된 이 신문은 일반 대중에게 자유, 민권 사상을 알리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1898년 독립협회의 해산과 더불어 폐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식 신문이 발행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신문이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그것은 ‘조보(朝報)’이다
지난해부터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가 되어 나무를 심었던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섭섭함이 있을 것입니다. 추억의 식목일에 심은 나무 중에 소나무가 많을 것입니다. 흔히 유럽 문화를 오크나무 문화라 하고, 지중해 문화를 올리브나무 문화, 일본 문화를 회나무 문화라 하듯이 우리나라 문화는 소나무 문화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기에는 ‘소나무 망국론’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 잘 자라므로 소나무가 잘 번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땅이 황폐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나무는 다시 사랑을 받고 있다. 산 속에 들어가면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나무가 뿜어내는 발산 물질인 피톤치드 때문인데, 소나무과 나무들에 이 성분이 많다고 한다. 또한 동맥경화에도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런 과학적인 규명을 내리기 전에도 우리나라 사람의 소나무 사랑은 특별났다. 속리산의 정이품송처럼 벼슬을 받은 소나무도 있으며, 사람처럼 성명 3자를 가진 소나무도 있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94호인 소나무는 성은 석(石)이요, 이름은 송령(松靈)이다. 더구나 이
논다고 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래서 연말에 달력이 나오면 누구나 달력을 보면서 다가올 연도의 일요일과 연이은 공휴일을 찾아봅니다. 일주일의 피로를 일요일 하루를 통해서 재충전의 기회를 찾고 피로를 풀자는 뜻에서 일요일이 생겨났습니다. 그렇다면 옛날에도 일요일과 공휴일이 있었을까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일요일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해가 떠오르면 논이나 밭으로 일하러 나가야 생계를 이었기 때문에 쉰다고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는 관리들에게는 일요일이 있어야만 했다. 일요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난 뒤 일본인들에 의해 1895년 4월에 강제로 실시된 을미개혁 때 양력을 사용하면서부터 쓰기 시작했으며 그 이전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일 년 내내 일만 하지 않았다. 고려, 조선 시대에도 오늘날과 똑같이 한 달에 다섯 번 정기 휴일이 있었다. 요즈음처럼 일요일이 따로 없었지만 음력으로 매달 1일, 8일, 15일, 23일에 쉬어 대략 일주일 단위로 하루씩을 쉬었으며, 달을 가르는 절기인 입춘, 경칩, 청명, 입하 등이 드는 날은 정기 휴일이었다. 그런데 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