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반가운 뉴스를 들었다. 우리나라 산사(山寺) 몇 곳(부석사, 대흥사, 법주사, 통도사)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다는 내용이다. 반가운 일이다. 절의 고즈넉함이 주는 청신함은 굳이 불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와 같다. 더구나 절이 산에 있으니 절을 찾아가는 길에 맑은 공기를 쐬고 푸른 숲을 보면 이미 정신이 말끔해진다. 서산 개심사 입구의 세심교(洗心橋)는 그런 점에서 이름과 실제가 딱 맞는 곳이다.그러나 즐거운 소식에도 걱정은 든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아지면 그 고즈넉함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미 몇몇 절은 유명세를 타면서 도시의 번잡스러움이 옮겨온 것 같다. 혹시 세계유산이란 이름값이 더해지며 다른 절에도 그런 현상이 생기지 않을까.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의 유명한 절은 대체로 산에 있어서 절을 찾은 이가 자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더운 여름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절을 목적지로 삼은 사람들에게 숲길을 걷는 시원함은 또 하나의 선물과 같다. 절은 그 내력 또한 만만치 않다. 당연히 절을 연 스님인 조사(祖師)를 비롯해 여러 스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뜻밖의 사람도 만날 수 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런 6월을 상징하는 날이 바로 ‘현충일’이다. 사전에서는 이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 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기념일(한국세시풍속사전/국립민속박물관)’현충일을 정의한 문장에 비슷한 낱말이 이어진다. 호국영령(護國英靈), 그리고 순국선열(殉國先烈)과 전몰장병(戰歿將兵). 전몰장병은 6·25전쟁 등 전쟁에서 돌아가신 군인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사실, 두 낱말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생산적인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라를 지키는 것(호국)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순국)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까닭에 같은 날 이분들을 기리는 것이리라.하지만 두루 통하는 현충일의 이념과 달리 이 분들이 목숨을 바칠 당시 상황은 모두 특별했을 것이다. 세상 그 자체인 자신의 목숨을 던지기로 결심했다면 정말 극단적인 상황에 맞닥뜨렸단 얘기다. 당연히 개인의 사정이 다르고 시대의 상황이 다르고 공간이 다른 상황일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호국과 순국에 이른 정신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국립서울현충원’은 추모의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제가 임시정부와 요인을 본격적으로 추적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일제의 표적이 된 김구 선생은 미국인 목사 피치(Gorge A. Pitch)의 도움으로 20여 일 몸을 숨겼지만 일제의 포위망은 더욱 조여 왔다. 바야흐로 임시정부의 피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임시정부에게 피난 생활이 별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구 선생에게 현상금 60만 원(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하이 주둔군 사령부가 내건 현상금 총액. 지금의 200~300억 원에 해당)이 걸려있고 조계지처럼 그들을 막아줄 무엇이 없다면 그 긴박함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낯선 이의 시선은 물론 현상금에 눈이 멀었을지 모를 밀정도 의심해야 하는 생활인 것이다.임시정부의 피난 생활은 1940년 충칭(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가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통솔하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그런데 사람의 일이 그렇듯, 죽을힘을 다해 버텨내는 동안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도 생겼다. ‘위기’, 위험하지만 기회도 동시
지금은 쓰지 않는 말 가운데 ‘직할시’란 것이 있다. 도(道)에 속하지 않고 중앙정부가 관여하던 도시로 부산이나 대구, 광주, 인천, 대전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의 광역시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형식적으로 중앙정부에 속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직할시’로 불렀다. 이런 지역이 예전에도 있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유수부(留守府)’다. 이곳에 파견되는 관리 ‘유수’는 지방 관리가 아니라 경관직, 그러니까 중앙정부 관리다.어떤 곳이 이와 같은 지위를 누렸을까? 처음에는 내력 깊은 도시가 그 이름을 얻었으니, 전 왕조의 도읍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전통은 조선에도 이어져 조선의 발상지였던 전주와 고려의 도읍지 개성이 유수부로서 지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전대미문의 병란을 겪으며 유수부 역할에 변화가 왔다. 유수부는 수도인 한양을 지키고 지역 거점 도시가 돼야 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조선 후기 네 개의 유수부다. 북쪽의 개성,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남쪽의 수원이다. 이들 도시는 조선시대 정부 직할시였던 것이다. 갈 수 없는 개성을 제외하고 세 도시에는 특별한 기억과 유적이 남아있다. 강화유수부, 서울로 가는 길목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있다. 봄이 왔으나 봄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건 사람, 또는 그 사회의 탓인 경우가 많으니 이 말은 자연이 변화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리라. 오히려 자연은 이름처럼 제 소임을 다하듯이 변화해야 할 때 바뀐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을 ‘철부지’라 이르며 분발할 것을 조언했다. 그러니 우리가 봄을 느끼는 것은 권리이며 동시에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태도를 갖추는 의무일 수도 있겠다.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봄을 느끼는 것일까? 사람마다 방법은 다르겠지만 답 가운데 하나는 뜻밖에도 우리말 속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우리말 중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계절을 이르는 낱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천천히 말해보면 입안에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게다가 계절에 맞는 뜻도 품고 있다. ‘봄’은 우리에게 ‘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봄이 온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겨우내 움츠려있던 자연이 기지개를 펴며 천천히, 그러나 뚜렷하게 계절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얼었던 물이 흐르고 들판에 푸른 기운이 보인다. 그렇지만 봄의 어떤 것도 꽃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