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선생! 주선생! 큰일 났어! 정윤이가 다쳤대!” 몇 년 전, 여름방학을 일주일 앞둔 어느 오후, 옆 반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성적입력을 마무리하던 나는 정신없이 두드리던 컴퓨터 자판에서 손을 떼고 벌떡 일어섰다. ‘정윤이가 또 뭔가 일을 냈구나. 할머니랑 같이 하교시켰는데 언제 또 학교에 온 거지? 걱정스러운 마음과 지쳐가는 마음이 뒤섞인 채 복도로 뛰어나갔다. “정윤이 보건실에 있나요?” “아니, 아니, 지금 뒷마당에 쓰러져있어,” “네? 쓰러지다니요?” “일단 와봐. 와서 봐.” 내가 목격한 것은 살아오면서 봤던 그 어떤 장면보다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둥그렇게 가지치기가 된 학교 뒷마당 조경수 사이에 쓰러져 있던 아이…. 아이의 두 종아리는 모두 두 동강이가 난 채 다리뼈가 밖으로 튀어나와있었고 이마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이는 여리고 작은 목소리로 “아파,아파.”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꿈 일거야! 꿈 일거야! 꿈이어야만해. 정윤이가 왜 저기서 저렇게 누워있는 거야.’ 드라마에서 혹은 영화에서 나오던 대사를 내 맘속으로 외치고 있던 그 순간 119응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상태로
그날, 그리고 그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땅의 선생님들은 두 번의 통곡을 했다. 세월호와 함께 차가운 바다 속에 잠기어 간 304명의 귀한 목숨들을 생각하며 울었고, 아이들을 구하다 실신해 구사일생을 구조됐던 단원고 교감선생님의 자살 소식에 또 울어야만 했다. 이 글은 교사로서의 내면의 상처를 고백한 글이었다. 교권보호 시스템의 부재는 교사를 향한 무한책임을 요구하기에 뜻하지 않은 사고나 사건 속에 휘말린 교사들은 보호받기보다는 소송을 당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온전히 내 제자만을 걱정하고 염려하지 못하며 갈등하고 두려워했던 내 모습이었다. 글을 통해 나는 그렇게 약한 존재였고 상처받는 존재였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 고백을 통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길 바랐다. 정윤(가명)이의 사고는 3년이 지나서야 마무리가 됐다. 사건이 종결되기까지 학부모와 이해당사자들과의 만남, 행정적 처리 그리고 내면의 갈등을 겪어오며 마음이 참 아팠다. 정윤이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목소리 그리고 동료선생님들의 도움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이었다. 이제는 우리 교육의 장이 울타리 없이 방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