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2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오피니언

[교사 에세이, 한 페이지] 생일

살다 보면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있다. 당연한 듯, 무심한 듯 지나가는 일상에서 잠깐 쉼표를 찍고 쉬어가다 보면 시선은 나를 향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보는 시선을 통해 한 걸음 더 성장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런 소중한 시간이 얼마 전 내게 찾아왔다.

 

어디선가 왁자지껄 소리가 아침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다.

 

“야, 여기로. 좀 조용히 해.”

 

어차피 조용함과는 거리가 먼 동네이지만 이른 시간부터 부산 떠는 일을 목격하는 건 좀 드문 일이다. 내가 일하는 교무실은 학생들의 공간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갑자기 30명쯤 되는 아이들이 복도를 메우면서 다가오더니 점령군처럼 우리 교무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생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생일 축하?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닌데….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날짜인 3월 20일. 아, 내 주민등록상의 생일이다. 3학년 영완이가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먼저 들어왔다.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이 웃으며 그 뒤를 따라 들어와 내 자리를 에워쌌다. 공간이 좁아서 20명 정도는 복도에 죽 늘어서 있는 상태였다.

 

깜짝 생일 파티

 

촛불이 켜졌다. 초는 커다란 것 하나만. 나중에 물어보니 선생님은 한 살부터 열 살, 백 살까지 늘 변치 않는 선생님이기에 초를 하나만 켰다고 한다. 센스 있는 녀석들이다. 초에 불을 켜자, 한 녀석이 신호한다.

 

“야, 리코더.”

그러자 리코더 독주가 시작되면서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생일 축하합니다.”

 

피리가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수십 명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가 전혀 부럽지 않았다. 피리 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들었던 어떤 생일 축하 노래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게다가 사탕 한 봉지와 오렌지 몇 개까지. 나중에 들은 바로는 아침에 집 냉장고를 뒤져서 몇 개를 가져왔다고 한다. 아이들로부터 교사가 이런 것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겠지만, 뭐 그런 게 대수랴. 아이들이 선생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준비한 생일 케이크를 받았다고 청렴 의무 위반이라고 벌을 준다면 나는 그 벌을 기분 좋게 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담임 교사가 아닌 내게 이런 마음을 베풀어 준 그 아이들은 2년 전에 가르친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작년에는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면서 친해졌던 애들인데, 그 아이들의 마음이 이렇게 깊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뜻하지 않았던 상황이라 그래서 더 고마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은 열심히 가르치고 많이 예뻐하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날 나는 여기저기에 이 사연을 퍼 올렸다. 동료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내가 이렇게 아이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멋진 교사라고, 아빠는 이렇게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들로부터 격려받으면서 참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날이 가짜 생일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주민등록상으로 다른 친구들보다 한참 늦게 되어 있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나던 때 아버지가 간경화로 사경을 헤맬 때라 어린 핏덩이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신생아 사망률도 지금보다 훨씬 높던 시절이라 1년 이상을 지켜본 후에 출생 신고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원래보다 1년 반 늦게 정년퇴직하게 된다. 주변인들에게 본의 아니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는 분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한다. 또래 친구들보다 늦다는 게 불편할 때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종로에서 술을 마시다가 검문 나온 경찰관으로부터 귀가를 종용받기도 했다. 만 17살짜리가 술을 마신다고, 대학생이니까 적발은 하지 않겠지만 오늘은 그냥 조용히 들어가라고 했다. 그것 말고도 나이와 생일에 얽힌 사연은 많다. 비행기를 처음 탈 때 생년월일을 너무 잘 적어서(?) 혼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그런 가짜 생일을 아이들이 일깨워 주었다. 나도 잊고 있던 생일을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생각해 준 셈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느 SNS의 연락처 목록에 생일 알림이 뜬 것을 아이들이 보고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나를 추종하는 한 녀석이 복도를 다니면서 선생님 생일임을 광고했을 테고, 친구들은 피리 부는 사내를 따라가는 동화 속 아이들처럼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그 이벤트는 25년 차 중년 교사의 마음을 건드렸던 것이고.

 

힘내고 살아갈 핑계 생겨

 

봄이 무르익으면서 교정에는 초록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아이들과는 늘 전쟁하면서 살아간다. 다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런 전쟁과는 차원이 다르다. 없는 생일을 기억하며 만들어 내고, 괜히 친한 척 살짝 몸을 부딪치기도 하고, 수업보다 오히려 내 자전거와 복장에 더 관심 갖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과 웃고 울면서 함께 성장하면서 맞이하는 전쟁이다.

 

이런 아이들로 인해 정말 멋진 생일이 생겼다. 앞으로 내 진짜 생일보다 더 설레고, 아침에 눈 뜨면 기다려지는 날은 아마도 3월 20일, 가짜 생일일 것이다. 이제 일 년을 또 새롭게 힘을 내고 살아갈 핑계가 생겼다. 내년 이날이 궁금해진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