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는 길을 뒤돌아보고 멈칫거리며 때로는 가던 길을 변경하거나 멈추고 포기하기도 한다. 이럴 때 무작정 참고 인내하라는 말은 별로 감응을 주지 못한다. 즉, 실효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는 길이 길이다’는 믿음이 확고하면 중간의 어떤 갈등과 고민도 극복할 수 있다. 마치 깜깜한 밤하늘에 유별나게 빛나는 북극성의 존재처럼 위로와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은 작년에 혜성처럼 나타나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작가다. 그가 40년 전에 소도시를 배경으로 쓴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펄롱은 땔감인 나무나 석탄을 팔며 아내와 다섯 명의 딸과 함께 소박하게 사는 성실한 가장이다. 지역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그는 당시 공공연한 비밀을 목격한다. 이는 사회보호시설이라는 명목 하에 갈 곳 없는 고아 소녀들을 데려다 강제노동과 학대를 가했던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바로 위 글의 대화는 주인공이 처음 수녀원의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을 알았을 때 놀랍고 두려운 마음에 자신의 트럭을 몰고 내달리기 시작했다가 점점 더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더 이상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때, 길가에서 잡초를 쳐내는 한 노인을 만나 길을 묻는 바로 그 장면이다. 이때 주인공은 노인의 말에서 가지 못하는 길이란 없다는 것, 모든 길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잠시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본다. 주인공은 결국 수녀원 석탄창고에 갇힌 여자아이를 몰래 탈출시키며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길에서 만난 그 노인의 말대로 주인공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자신의 의지대로 간 것이다. 아이를 몰래 빼냄으로써 본인 석탄사업장의 최대고객이자 지역사회에 영향력이 큰 수녀원과 관계가 틀어질 위험이 컸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길을 갔다. 그 길이 옳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마치 미국의 민중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이란 시를 읽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졌다.
“…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길 하겠지요.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우리는 삶 속에서 옳다고 생각한 길이라면 시(詩)에서처럼, 또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흔들림 없이 가야 한다. ‘무소의 뿔처럼’ 말이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말하며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또는 그저 타성에 젖어 옳은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마지못해 선택한 행위에는 반드시 깊고 오랜 후회만이 남는다. 오늘도 세계 도처에서 아니 우리 주변에서 옳지 않은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이때 대부분은 두렵고 용기가 없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곤 한다. 이는 마치 꿩이 수풀에 머리만 처박고 있다가 몸뚱이를 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다. 불의를 보고 눈감아 외면하면 결국 어리석은 꿩과 같은 신세가 될 것임을 잊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부조리와 불공정, 불의는 알면서도 눈을 감고 그냥 지나칠 일이 결코 아니다. 그 부작용과 후유증은 언젠가 결국 나와 가족, 친구, 친지들에게로 돌아오고 나아가 우리 사회, 국가 전반에 걸쳐서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고 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여기엔 ‘행동하는 양심’과 ‘용기’가 절대 필요할 뿐이다.
양심은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찍이 맹자 성인이 말한 4단 ‘측은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이란 인간 본성의 기본 틀을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이를 실천하다 의미 있게 죽은 수많은 영혼들로부터 구원을 받아 살아가고 있다. 이른바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미 없는 죽음은 그 자체로 백해무익하다. 살아서 깨어 있는 지혜를 얻어 이를 적극 실천하고 행동함이 진정한 지식인이요, 지성인이다. 특히 양심과 행동이 필요한 이 시대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삶이 ‘무임승차’ 하듯이 그냥 묻혀 지나고 자신의 안위만을 보전코자 한다면 이 또한 의미 없는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결코 깨어있는 민주시민이라 할 수 없다. 어둠이 빛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자신이 가는 길이 길이라 의심치 않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와 용기를 북돋아 스스로를 교육하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이다. 지치고 힘겨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순간순간 부서지고 깨어져도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함을 믿자. 그리고 서로가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자세로 안과 밖에서의 연대와 협력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